(기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정 민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제 8 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1860년대부터 조선인의 이주가 이루어져 1917년 전노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이곳에서 조직될 만큼 한인의 항일저항 메카로 통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 죽음이 이 땅을 적셨다. 독립운동지도자인 이상설(1870〜1917)선생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민주평통 하남시협의회(이하 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들은 우수리스크 우체스노예마을 어귀의 수이푼 강변에 선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遺墟地)로 향했다. 강가에 쓸쓸히 서 있는 화강석 비석이 고독했던 한 선구자의 그림자처럼 우리 일행을 맞아줬다. 우리 일행은 그분의 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네델란드 헤이그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추대됐다.

  중국 룽징에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세워 후학을 기르고 항일 의병부대인 13도 의군,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 등에서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3월 47세로 임종에 들며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강에 뿌리라”고 유언했다. 고향 충북 진천을 떠나 이국(異國)에서 험난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이 들었다. 수이푼강에 뿌려진 재는 동해로 흘러 넋이나마 조국강산에 닿고 싶은 생각이었을까.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 독립 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한‧ 러 수교 20주년기념.’ 보로다르스코 38번지 벽돌집 벽면에 붙어 있는 동판 글귀가 우리 일행의 눈길을 한참 동안이나 붙들었다.

  러시아 이름 ‘최 표토르세메노비치’로 러시아와 중국을 누볐던 최재형(1860〜1920)선생은 기업가, 교육가, 독립운동가로 연해주 한인을 이끈 등불로 평가받는다. 일찍 일군 부(富)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비(伊藤博文) 거사(擧事)를 지원하는 등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한인 후손 교육을 위해 30여개 학교를 세웠다. 연해주 한인들이 그의 덕행을 기려 ‘최 페치카(난로)’라 부를 만하다.

  그밖에 연해주 독립 운동가들은 볼셰비키(적군파)활동 등으로 붉게 채색돼 외면당하거나 뒤늦게 조명되었다. 그들의 공산당 활동은 당시 목숨을 부지하고 조국 독립을 위한 방편이었던 만큼 민족주의운동 선상에서 재해석될 때가 되었다.

 

하남시협의회 회원들은 하바롭스크로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우수리스크 역 사이의 라자돌노예 역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70km 떨어진 이역은 한적한 화물전용 기차역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너무 조용하고 적막해 이곳이 과연 역인가 싶었다. 넓은 대지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1937년에는 어떠했을까. 이곳도 우리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화물전용 역이란다.

  한인들은 ‛짐짝처럼 취급받았다’고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거품을 물어가며 설명했다. 아무 힘도 없는 남녀노소 한인들은 보따리를 등에 지고 메고, 겁을 먹은 채 쪼그리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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