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섭 백제문화 연구회 회장(역사문화 신지식인)

세계 최대의 고분을 조성한 백제의 국력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는 사(史)피아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를 배운 결과로 세계 최대의 고분을 조성한 것에 대하여 수긍하기 어려운 생각의 구조를 갖고 있다.

백제의 실상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동양을 지배한 국가임을 실증에서 밝혀지고 있다.

우선 신라와 고구려 사이 즉 2:1이라는 삼국간의 각축전에서 버티어온 힘의 논리에서 보면 가장 강한 국가임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중심에서 500년간 도읍을 정하고 공주나 부여로 천도한 백제는 분명히 우리민족의 중심에 속하는 세력이다.

우리의 표준말은 서울말이며, 북한의 표준어도 개성으로 모두 백제문화권 언어의 뿌리이다.

지금까지 우리문화의 뿌리를 탐구하거나 깊이 있게 생각해 본적이 없기에 정치권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구분하는 백제와 신라라고 단순하게 구분한 것이 얼마나 잘못인가를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백제의 중심은 서울이며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한 국가로서 한강권의 문화이다.세계 최대의 고분을 조성한 우리민족의 중심인 백제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알지 못하면 세계 최대의 고분을 조성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은 삼국의 문화를 비교하기를 신라는 드라마틱하고 고구려는 고딕식이며 백제는 낭만적이라 표현할 만큼 유일하게 우리말로 표현하기 쉬운 문화이다.

지금까지 백제가 제일 먼저 망하였다 하여 가장 약한 국가로 알고 있지만 멸망할 때의 과정을 살펴보면 나당 연합군이 왜 결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 백제와 왜군이 연합하여 동양 최초 국제전이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백제사가 왜곡되어 있다. 동양 최초로 국제전이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를 알 수 있는 유적이 민둥산 금성분이다.

지금까지는 신라가 외교를 잘하여 당나라를 불러 들여 연합군이 구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과연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나라가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군을 파병한다는 것은 남의 나라를 구원하기보다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대군을 파병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당나라 앞의 수(隋)나라가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우는 과정에서 나라가 비폐 하면서 내란이 일어나 망한지가 44년 밖에 되지 않았다(서기 616년 수나라 멸망, 서기 660년 당나라 백제침공).

수나라가 멸망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당나라가 백제와 싸우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 13만 대군 파병을 단행한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으로 당나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당나라로서는 시급한 실정으로 그 만큼 백제가 강성한 국가가 되면 자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에 백제 정벌에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영토는 넓은 만큼 당나라 주위에는 적으로 둘러 싸여 있어 자국을 비워 둔다는 것은 위험하며, 자칫 수나라 멸망과 같이 되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당나라가 파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막판에 당나라와 신라의 전쟁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는 신라와 싸움을 전개하는 것만 보아도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은 당나라가 신라를 구원하려고 파병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 이유로서 만약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면 동양에서 제일 강대한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본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당나라로서는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다.

특히 백제는 나라가 강성해 지면 중국으로 진출하여 땅을 차지하고 다스린 전력이 있는 국가로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판단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백제 구원군인 왜군이 백강에서 당나라와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하면서 백제는 부흥하지 못하였다.

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게 되면 동양에서 제일 강대한 국가가 되므로 당나라로서는 가장 염려가 되었다. 그 이유로서 백제는 천문제도에 의한 중국지역으로 진출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천문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사상은 하늘의 뜻으로 변하지 않는 무서운 계시로서 이행하고자 하는 뜻이 강하다는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여 망명 세력들이 일본으로 물러간 뒤에도 당나라가 일본까지 공격할 우려가 있어 성을 쌓고 대비한 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 일본의 후쿠오카에 백제인 들이 조성한 대재부(大宰府)의 수성(水城)을 쌓고 당나라 침공에 대비한 유적이 잘남아 있다. 

<그림1>과 같이(나무심은 부분) 어립천(御笠川)을 막아서 벌판에 물을 채운 해자(垓字)로 적을 막아내는 수성(水城)을 조성할 만큼 그 당시는 해상 운송으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하는 전쟁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왼쪽 그림1 참조)

이와 같은 유적은 김제의 벽골제로서 원평천을 막아서 벌판을 해자로 조성한 것과 같이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는 해자를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벽골제나 눌제, 황등제와 같이 벌판을 막아서 물을 채운 것은 저수지가 아니라 백제시대의 해자로서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한 수성에 속한다.

 해양진출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천문과 역법에 능통하여 물때와 일기를 볼 줄 알면서 해양국가로서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남해안은 수천개의 섬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기에 항해술이 그 어느 곳보다 발달하는 입지를 갖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와 인류 역사상 해전에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이순신과 같은 인물도 동양에서 가장 해양진출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 입지적인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대 유물을 살펴보면 가장 천문이 발달한 민족이라는 것이 입증이 되고 있어 백제의 일본과 중국 진출은 당연시 되었다. 그 이유로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후방을 침공하려고 세력을 키웠던 것이다.

『송서(宋書)』의 기록에도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遼西)를 차지하였다는 대응하는 차원에서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분봉국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키워 갔던 것으로 신라와 당나라로서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을 입증하는 유적이 금성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세계 최대의 민둥산 금성분에서 알 수 있다.

민둥산 금성분은 태양의 제국 백제의 국가관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일본으로 진출한 것은 아침별인 금성이며, 중국 요서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저녁의 금성으로 백제가 거느려야 할 천문에 의한 국가관이다.

즉 태양인 백제는 항상 금성의 아침별과 저녁별을 거느려야 한다는 천문사상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로서 신의 뜻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분봉국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세계 최대의 금성분을 조성한 것은 금성의 문화가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고 제정일치 사회 천문의 뜻은 어길 수 없는 철칙으로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한 태양의 제국이다.

특히 극동지역인 우리나라는 아침의 문화가 발달한 관계로 샛별인 금성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의 정사인 『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양서(梁書)』 에 요서(遼西)지역에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에 백제군(百濟郡)이라는 자치 지역을 두고 다스렸다는 기록이 엄연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식민사학은 잘못된 기록으로 보면서 다양하게 왜곡하여 왔었다. 특히 여러 중국의 정사에 기록된 백제의 왕들과 많은 장군들 명칭의 기록까지 무시하면서 우리민족사에 가장 역동적인 긍지의 역사를 소멸 시키고자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것이다.

백제의 동쪽 일본의 나라(奈良)지역과 서쪽 중국의 요서(遼西)지역을 선으로 긋게 되면 그 당시의 동서 방향으로 일직선이 된다.

백제의 천문에 대한 관념은 일본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은 백제가 거느려야 한다는 사상에서 진출한 제정일치 사회의 제도이다.

고대국가의 명칭 ‘나라’는 우리말 날짜의 ‘날’로서 태양을 뜻하는 신앙에서 태양이 거느리고 있는 아침의 샛별과 저녁의 금성은 태양제국의 기본적인 사상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금성과 관련된 우리문화에 대한 고대 사상을 연구한 적이 없기에 민족사를 밝히지 못하였던 것이다. 금성이라는 명칭인 서양의 비너스(BENUS)라는 어원을 추적하면 금성의 문화가 어느 곳에서 시작된 문화인가를 알 수 있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물의 비를 뜻하는 우리말이며 ‘너’는 우리말 나 아닌 너로서 2인칭에 해당되며, ‘스’ 는 서양에서는 신(神)을 뜻하며 우리도 ‘스님’ ‘스승’의 ‘스’는 성스러움의 ‘신’을 뜻한다.

우리말 ‘비너신’은 ‘물의 2차적인 신’ 으로 용(龍)을 표현한 것이다. 용(龍)은 금성에서 발생한 물의 신(神)으로 우리말 어원에서 서양의 ‘비너스’라는 것은 우리말 물의 신, 금성을 뜻하는 명칭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물로서 우리말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비 나이다’ 하는 것은 비는 물이라는 뜻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영어에서는 레인(Rain)이며 ‘비너스’의 어원은 그 어느 나라 말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우리말에서 전해진 어원이다. 간단한 어원 같지만 많은 고대 천문의 명칭이 우리말에서 전해진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천문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것으로 예수 가 탄생할 때 찾아간 천문학자는 동방박사이다.동양에서 천문이 제일 발달한 민족이 한국이라는 것이 신석기 시대의 돌칼과 비파형 동검 같은 각종 유적과 유물에서 입증되고 있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백제의 천문사상은 중국과 일본에 분봉국(分封國)을 설치해야 한다는 국가의 기본 방침이 있기에 당나라는 백제를 항상 주시 하면서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왼쪽 그림2 참조) 

 지금까지 고대 천문사상을 알지 못하였기에 신라가 외교를 잘해서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하게 한 것이라고 잘못 해석해 왔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천문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으로 생활과 풍속 제도 모든 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불교가 유입되기 전의 백제 초기는 천문과 관련된 전통 문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천문과 관련된 무덤을 세계에서 제일 크게 조성하였다는 것은 국력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한강권에 중국의 남조(南朝)의 유물과 무령왕릉 등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 당시 백제는 중국과 왕래가 잦았다는 것이 여러 유물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을 능가하는 위세적인 무덤을 조성한 국가이다.

특히 무덤은 가장 보수성이 강하면서 국력을 나타내는 유적이며, 이러한 것을 입증하는 유적으로는 불교가 유입되어 처음 세우는 목탑의 규모도 동양 최대이다.(그림2:중국 남경의 목탑)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사리를 안치하는 점에서 지금까지 신라의 황룡사 목탑의 한변이 18m로서 높이가 83m로 알려져 있으나 하남시 백제왕도 목탑의 한변의 길이는 27m로서 목탑으로는 가장 방대하다. 

<그림 3>은 하남시 동사지에서 발견된 목탑 막새기와로서 모서리까지 문양을 넣은 것은 목탑 형식의 기와로서 유일하게 동사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또한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백제의 기와는 세계 최대의 규모로서 무게가 약 19kg이며 현재의 기와는 약 4kg 정도로서 무려 5배에 가까운 크기의 기와이다.(왼쪽 그림3 참조)

사피아 들은 통일 신라 시대 무기고라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최근 신문에서는 “둥글고 반듯하고····남한산성 돌 모양이 왜 다를까”라는 제목의 기사로서, 남한산성 화강암 성벽의 석재를 “경기도 포천이나 경북 문경에서 운반해서 사용한 것 같다”라는 내용을 신문에 올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 2014년. 6월 20일자 21면)

세계 문화유산을 등재하고자 하는 유적을 이처럼 단순한 것도 거짓으로 사피아 들은 백제유적을 왜곡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위례성 백제사』 참조)

남한산 일대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화강암 석재를 사피아 들의 말대로 문경이나 포천에서 돌을 운반해서 남한산성을 신라가 쌓았다는 말이 된다. 신라가 무기고를 남한산성에 만들기 위해서 경북 문경이나 경기도 포천에서 성돌을 운반해서 거대한 남한산성을 쌓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피아 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수시로 국민을 우롱하는 주장을 하고 있어.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높고 험준한 남한산성까지 화강암 돌을 운반하여 성을 쌓는다는 것은 단 시일의 축성이 아니라 최소한 수십 년이 걸리는 거대한 토목공사로서 국력의 소모가 엄청난 것이다.

사피아 들의 주장대로 신라가 변방에 이러한 성을 쌓았다면 신라의 도읍지와 가까운 곳에는 이보다 더 방대하고 정교한 성을 쌓았을 것이다. 남한산성일대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화강암 석재를 험준한 남한산으로 운반하여 둘레 11.76km의 거대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백제의 왕권 이외는 있을 수 없다.

남한산성에는 엄청난 백제 유물이 발굴되었어도 이를 숨기고 거론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한사군 설을 정당화 하려는 속셈이다.

백제시대 남한산성과 같은 거대한 성을 쌓았다고 하면 지금까지 축소왜곡 해온 것이 탄로가 나면서 몽촌과 풍납토성 왕성설과 사피아의 대표적인 학설 한사군설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간단한 것만 살펴보아도 백제의 국력을 이해하게 된다.

①세계 최대 규모의 민둥산 고분, ②동사지 최대의 목탑, ③ 목조 단일 최대의 교산동 왕궁 건물지, ④ 화강암 석재 운반의 둘레 11.76km의 남한산성 ⑤ 남한산성 건물의 최대 크기의 기와 ⑥ 일본과 중국의 분봉국 건국 등 모두 같은 한성백제의 국력을 가늠하고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의 기록에 속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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