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정 민채

  (제 2회) 연해주의 지리적 특성과 한인이주


 연해주는 지리적으로 동경 130.63도, 북위 42.27〜48.4도에 위치해 있으며 유라시아대륙의 태평양연안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헤이룽장성, 동쪽으로는 동해, 북쪽으로는 하바롭스크 주, 최남단 끝부분은 길이 17km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경북도와 접해 있다.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여름철에는 몬순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강우량이 많으며, 산지는 활엽수와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면적은 약 207,000㎢에 달하며 한반도와 거의 비슷하다. 연해주의 젖줄인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유역은 넓은 평원을 이루고, 수원(水源)이 풍부한 커다란 한카호(湖)가 서쪽에 있어 농업생산에 필요한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될 때까지 이 광활한 지역은 여러 종족의 거주민이 불과 12,000여명이 살고 있었으며, 주로 수렵(狩獵)· 어로(漁撈)· 순록사육 등의 생업에 종사하는 미개척 지대였다.

  발해의 고토(故土) 연해주는 발해 멸망 후 천여 년 동안 가히 무인(無人)지대로 방치되었다가 러시아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그것도 점령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다시 발해의 후손이 이곳에 이주하게 되었으니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조선의 좁고 척박한 농토로 인한 극빈과 영세성,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린 농민들이 새 생활의 활로를 찾기 위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인접한 러시아의 비옥한 땅에 대한 동경, 정부의 과중한 군역(軍役) 등도 한 이유가 된다. 

  당시 조선 정부는 국민보호라는 명분으로 월강(越江)이민을 금지하고 내왕과 교역하는 것을 통제하였으나 실제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강 건너 비옥한 땅을 두고 월강 죄가 두려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한일 합방 후에는 애국지사들이 항일투쟁을 하기 위하여 망명기지를 이곳으로 정함으로서 한인들의 독립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초의 이주는 1863년 한인 농가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 노브고르드만 연안의 포시에트지역에 관유지(官有地)를 점유하고 정착했다. 당시 여타 한인들은 두만강을 몰래 넘어와 농사를 짓고 추수를 끝낸 후 재차 조선으로 월경하는 계절출가(季節出家) 농업에 종사했다.

  1864년에는 60호가 이주했고, 매년 이주자 수가 증가해 1868년에는 165호, 1869년에는 776호로 이주 가구가 증가했다. 이렇듯 연해주 한인 이주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1885년에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한인이 8,500명, 러시아 국적을 갖지 않은 한인이 12,500명이나 되었다. 또한 계절노동자로 임시 이주한 한인이 3,000명 등 총 24,000명의 한인이 연해주에 거주했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 한인의 연해주 이주는 큰 영향을 받아, 경제적 동기 외에 정치적 이유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연해주로 이주한 많은 수의 한인은 연해주 각지에서 국권회복 운동에 적극 나섰다. 더욱이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한인 이민은 급증하여 1914년에는 63,000명을 기록하였으며, 1923년에는 공식적으로 러시아내 한인 수가 10여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5만 명 이상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당국은 이주 한인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첫째, 이주 한인들이 러시아 정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쉽게 동화하지 않는 점이었다. 동화를 거부한 한인들이 전래(傳來)의 풍속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견지(堅持)한다면, 거대한 이질집단을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언젠가는 민족적 문제를 야기 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는 해를 거듭하면서 한인이주가 급격히 증가하는 점이었다. 한인들의 이주가 많아질수록 러시아화의 속도는 느려졌다. 왜냐하면 한인이 많으면 한인끼리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한인 고유의 관습을 유지하게 되어 동화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대단위 한인 집거지(集居地)를 형성하게 되고 후일 한인 자치향(自治鄕)을 구성하는 계기가 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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