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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고도(古都)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기고)하남시 3.1독립운동 기념사업회장_구자관
뉴스일자: 2016-05-19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최초 도읍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이성산성((二聖山城) 이다. 백제 초(初)․중기(中期) 고도(古都)는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할 때부터 문주왕이 웅진(雄鎭 현재의 공주)으로 옮기기까지의 이름이다.

백제 초․중기 고도라 함은 역대 31대왕 678년에 신라에 패망하였고 온조왕으로부터 21대 개로왕(蓋鹵王)까지 21왕 493년을 백제의 초∙중기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초․중기 구도에 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산(負兒山)에 올라가서 도읍터를 바라보다가 하남(河南)의 땅이 북(北)에는 한수(漢水 한강)가 있고 동(東)에는 높은 산(黔丹山 남한산)이 있고 남(南)에는 기름진 넓은 땅(西廣州平野)들이 있고 서(西)에는 큰 바다(仁川 앞바다)가 막혔으니 여기에 도읍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여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 이곳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이성산성이다.

처음에는 위례성 다음에는 한상아래 고골, 그다음이 한산이다. 한산은 고을 이름이 아니라 산 이름이니 남한산일대를 한산이라 한 것이다. 신단(神壇)실기(失期)에는 광주(현 하남시) 이성산을 위례성이라 하였다.

이성산은 광주군 서부면 초일리(현 하남시 초일동)에 있으니 산허리에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 남아 있다. 특히 백제만의 특이한 건축양식인 팔각정(八角亭) 구각정(九角亭)의 주추석이 가지런히 보존되어 있는 것도 대표적인 물증일 것이다. 석성의 축성(築城)도 많은 전문 학자들이 기단(基壇 밑바닥)이 백제성(百濟城)이 분명하다고 한다. 또한 그간 발굴한 출토품 중에 상당부분이 백제우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로 알고 있다.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패배한 뒤 고구려가 점령하였고,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신라가 다시점령 하였다. 그 후 통일신라가 고려에 멸망한 후 고려의 땅이 되었으니 성도 맨 아래 기단에 백제성, 그 위에는 고구려성, 그 의에 신라성, 그 후에 고려성이 증축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의 발표는 이성산성이 신라성(新羅城)이라고 단정하면서 이성산이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그 후 몽촌토성설(夢村土城說)은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하였으나 주춧돌 하나 나오지 않아 백제도성(百濟都城)이란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그러더니 근래에 와서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백제의 최초 도읍지라고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읍지로서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반주민의 생활용품정도가 발굴된 것으로 안다. 어욱이 풍납토성은 한 나라의 왕도(王都) 일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도읍지였다면 우선 왕궁이 있어야하는데 1,500-2,000년 전의 왕궁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주춧돌은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

둘째 지정학 적으로도 당시 한강 건너 아차산(峨嵯山)에 고구려 장수왕이 친히 내려와 백제를 공격하고자 노리고 있는데 바로 강 건너 풍납동에 왕도를 두었겠는가 하는 점.

 

셋째 기상 관측이 없던 시절이었고 수많은 홍수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강상류에 7개의 댐이 설치돼 홍수를 예측하고 조절하며 예방도 가능하나 1,500-2,000년 전에는 예측할 수 없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예기치 않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졌을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을축년(乙丑年 1925년)대홍수에 풍납토성 일부가 유실되었고, 수백호의 가옥도 유실된바 있었다. 가장 가까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지금 둔촌동 한국체육대학 앞까지 한강 물이 범람 하였다. 그러게 홍수가 나기만 하면 고립되는 풍납토성에 왕도를 정하였겠는가라는 점.

넷째 일부 학자들은 셋째와 같은 경우는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발굴된 유물만 가지고 입증(立證)하려 하나, 전략 전술적인 고려는 전혀 없었다는 점.

다만 풍납동 뿐만 아니라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미사리 선사유적지 등에서 보듯 그곳은 당시 주민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고기를 강에서 잡아먹고, 강변의 비옥한 토지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위험을 무릎 쓰고라도 강변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홍수 등 재앙으로 수많은 인명이 한순간에 없어져 버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다만 이곳은 백제로서는 전술적인 전방 부대였을 뿐 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역이 1963년 광주에서 서울로 편입되면서 서울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아 발굴하면서, 그곳이 마치 백제왕도 하남위례성인양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백제 초∙중기 고도 하남위례성은 확정된바 없다. 그리고 유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별 할 수도 없다. 고대(古代)로 올라갈수록 유물이 적을 수 있으니 적게 나와도 백제유물이 나왔다면 그곳은 백제의 최초 도읍지 하남위례성이 분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 500년의 왕도로서 자랑스러운 우리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향토문화(鄕土文化) 창달(暢達)에 이바지함은 물론 하남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드높이고 내 고장 역사와 맥을 잇는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

하남신문aass65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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