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민주평통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 정 민채

 이승만의 집권 중 불가피성의 흐름

K출판 교과서와 M출판 자습서에는 친일파 청산으로서 반민족 행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즉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보다는 반공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며 반민(반민족 행위자 처벌)특위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반민 특위활동을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구속하는 등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일부경찰들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위의 주장은 맞다. 그러나 신생독립국에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1946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과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주동한 폭동이 대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경북, 경남, 전남으로 번져 나갔다. 또한 1946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조선인민유격대는 호남, 지리산, 태백산, 영남, 제주도 등에서 토벌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한국전쟁의 전초전을 형성했다. 1946년 5월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냈다. 1948년 4월 3일부터 제주도에서 남로당 무장대와 국군․경찰 간의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에 반대한 군부대가 봉기하였다. 1949년 6월 남로당 프락치사건으로 김약수 등 13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송두리째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 6․25전쟁을 맞이했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을 제거하는 기술자로서 동원된 사람이 대표적으로 노덕술이다. 공산당 잡는 데 공을 세워 친일한 죄를 갚으라는 것이다. 암살이 예사로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공산주의를 막는 기술자로서 이용한 것이지 나라의 주류(主流)나 근간이 되도록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라 전체에 공산주의자들이 잡초처럼 돋아나 있으니 친일파를 청산할 여유가 없었다. 이승만의 사상은 철저한 반일이다. 친일파가 대한민국의 주류나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게 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는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은 인물이다. 친일파를 건국의 주도 세력이나 주류로 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다(신동아, 2015, 손세일).

 

이승만의 집권 중 과오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에 비판적인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이승만의 다음 대통령 당선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52년 1월 정․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내각책임제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안은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1952년 전쟁 중 부산에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폭력배와 군인들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을 발췌개헌이라 부른다.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고치려 하였다. 1954년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에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 할 수 있도록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국회에서 1 표차이로 부결되자 자유당은 사사오입(반올림)의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 통과를 선포하였다. 이것을 사사오입 개헌이라 부른다. 이 개헌으로 이승만은 3선에 성공한다.

이승만은 헐벗고 굶주린 이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부통령 부정선거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사망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나이 많은 그의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여야 하므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이 중요하였다.

선거 이전부터 이승만정부와 자유당은 관권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준비하였다. 선거 당일 전국 각지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과 자유당은 몰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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