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하남시 3.1독립운동 기념사업회장_구자관

 지금으로부터 97년전 1919년(기미년) 3.1독립만세 운동에 손병희선생을 비롯 33인의 독립선언으로 그동안 참고 견디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급기야 전국민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남녀노소, 계급, 직업에 관계없이 아무런 무기도 없이 오직 몸으로 저항하며 자주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간악한 일본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많은 국민이 희생 되 였으며 집단적으로 방화 학살을 함으로서 전국적으로 수천명의 국민이 희생되였다.

당시 하남에서도 3월 26일, 27일 독립운동의 불길이 일어났다. 하남시는 광주군 동부면(인구 5,000명)과 서부면(인구 4,000명)으로 지역의 지도자들이 은밀히 연락을 취하여 3월 26일밤에 봉화로 서로 연락하여 3월 27일 구천면 상일리(현, 강동구 상일동게내 현, 상일초등학교옆) 일본군 헌병주재송 집결토록 연락하고 각 지역에서 주민을 동원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산리 구장이였던 이대헌(李大憲 1883-1944)선생의 주도로 26밤에 주민 수십명과 마을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내려와 27일 주민들과 함께 동부면 사무소(현, 천현동 동경주 마방집옆)에 집결 격렬한 독립만세를 외치고 그 여세를 몰아 구천면 상일리로 친출하고 망월리(구산 천주교성지)의 구장이였던 김교영(金敎永 1858-1929)선생은 천주교인으로서 드물게 참여한 분으로서 마을뒷산에서 26일 봉화를 올리고 다음날 27일 주민과 함께 동부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 운동을 벌이고 이대헌(李大憲)선생과 함께 구천면 상일리 일본군 헌병주재소로 몰려 갔으며 풍산리(현, 황산) 김홍렬(金弘烈 1866-1948)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독립정신 취지에 찬동하여 풍산리 주민 20여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다음날 27일 동부면사무소(천현동, 마방집옆)로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시 이대헌, 김교영선생과 함께 구천면 상일리 일본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으며 서부면 감일리 구희서(具羲書)선생은 구씨네 집성촌으로 조선이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군중과 같이 26일 저녁에 뒷산에 올라 보오하를 올리고 27일 주민 40여명을 인솔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부면사무소(초이리, 지지미)를 향하여 행진하던중 주변부락 주민들이 자진 참여하여 면사무소앞에 이르렀을때 800여명의 군중이 모여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으며 다시 구천면 상일리 일본군 헌병주재소에 도달 하였을때는 위 네분이 인솔한 군중이 1,000여명으로 늘어 격력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다.

당황한 일본군 헌병은 비폭력 시위군중에게 해산 할 것을 명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보다더 강력하게 항거하자 발포하여 서부면 구희서선생이 인솔하던 시위자중 안종헌(감북리)과 최천성(감이리)두분이 희생(사망)되였다. 그로인해 시위를 주도한 네부은 일제히 체포되여 갖은 고문과 형벌을 받고 형이 확정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였으나 계속된 일본 경찰의 감시로 모진 고통속에 숨어 살게 되었다. 

 

3.1 독립운동 유공자(기록)

성명

주 소

생년월일

사망월일

당시

연령

형기

훈격

수상자

이대헌

광주군동부면교산리 160

1883.11.14

1944.6.8

36세

징역

1년

건국훈장

애족장

인천거주딸

김교영

광주군동부면망월리 323

1958.12.20

1929.5.9

61세

징역

1년6월

건국훈장

애족장

손,김금자

김홍렬

광주군동부면 풍산리 105

1886.12.7

1948.10.10

34세

징역

1년

건국훈장

애족장

자부(익산)

강춘심

구희서

광주군서부면감일리 246

1872.11.6

1951.2.7

47세

징역

8월

대통령표창

손자

구자상

 

 

3.1 독립운동 당시 희생자

성 명

주 소

당 시 연 령

비 고

안 종 현

광주군 서부면 감북리

1863년생

당시56세

1919년 3.27

일본군헌병의 발포로 희생

최 천 성

광주군 서부면 감이리

1897.5.5생

당시 23세

1919년 3.27

일본군헌병의 발포로 희생

 

위의 기록과 같이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네분은 각자 옥고를 치르고 나온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여 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은바있다.

그후 90면간은 잊어버린 세월 속에 흘려보내고 지난 2015년 3.27에 하남시의 적극적인 지원과 광복회,3.1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및 지역의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의 노력으로 하남시청앞 공원에 「하남시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라도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비폭력 저항운동인 독립만세 운동으로 세계만방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우리조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독립운동가를 비롯 후손들의 생활을 어떠하였는가?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재산도, 직장도, 직업도 잃고 집도 없이 숨어 살다보니 자손들은 교육도 못시켜 지금도 대를 이어가며 가난속에 막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현실 앞에 의분을 느끼게 된다.

이제 3.1독립운동 100주년 (2019년도)을 3년 앞에 바라보면서 우리의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100년전에 우리선대들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어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통일의 해, 민족중흥의 해로 결정하고 전 국가 범국민적인 국민운동으로 승화 시킬수 있도록 착실한 준비와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하남시도 매년 3월 27일을 「하남시 3.1 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고 시민, 학생, 사회단체, 보훈단체등 전 시민이 기념 할수 있도록 하며 2019년 3월 27일 100주년 기념일에는 다시한번 선대들의 애국정신과 국민의 단합된 힘을 모을수있는 기회로 삼을 것을 간곡히요청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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