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교범 하남시장

 

 시의회 의장·민선 시장 세 번 등 하남시정을 맡으며 항상 마음에 담고 있던 숙원사업 완성시기가 도래해 하남시 교산동 광주향교(廣州鄕校)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가볍다.

 수많은 대형 사업을 발주하고 완공했지만 ‘광주향교 주변 경관광장 조성사업’은 ‘하남역사박물관’ 건립과 더불어 가장 뜻 깊고 보람된 일로 꼽고 싶다.116억 원의 소규모 사업이지만 그동안 향교 주변 격에 맞지 않는 음식점과 협소한 진입로 등을 새로 단장해 연말께 향교 본래의 교육적 기능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할 때 사업 진행속도는 더디게만 느껴진다.

 향교는 정식학교로 인정되지 않지만 고려 때부터 이어온 지금의 공립고등학교로 사립학교인 서원(書院)과 구분된다. 요즈음 언론의 보도를 보면 교사와 학생 또는 교사와 부모 간 다툼으로 교육의 권위가 떨어졌고, 학생은 학대를 받아 학교에 인권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기우이고 어불성설이다. 언제나 큰 사건 사고가 날 때면 교사는 학생을 위해 희생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교사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됐을 것이다. 또 지난해 미국 센디훅초등학교 정신질환자 총기난사 사건 당시 여교사는 학생들을 캐비닛에 숨기고 자신은 범인과 대치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례를 보더라도 국적을 떠나 선생과 학생 관계는 숭고한 정신이 바탕이 돼있다.

우리에게는 유교정신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다른 나라보다 스승의 제자를 향한 사랑의 정도가 크다. 어린 시절 향교에서 수학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학자가 향교를 거쳐 성균관으로 입학했고,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던 선생님들의 말을 반추하며 가슴에는 자부심과 애향심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향교를 찾아가면 성현의 가르침이 몸과 마음에 절로 스며들고 유학생들이 책을 읽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광주향교는 최초 창건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 후기 숙종 29년(1703년)에 국가사적 제422호로 지정된 이성산성 아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광주목(廣州牧)의 설치를 보더라도 목(牧)에 향교가 설치된 것을 유추해 보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한다.

규모로는 지금의 경기 수원·화성·의왕·성남·광주, 서울 강동·강남·송파까지 관장해 전국에서 제일 컸으며, 평지에 세운 경기지역 유일한 향교로 대성전 등 여섯 동의 건물을 갖추고 공자를 비롯한 이황·이이 등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석전봉행을 실시했다.

향교는 단순히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고려 때부터 이어온 유교사상의 가르침은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기에 배우고 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변 경관광장 조성을 통해 광주향교가 문화재적 가치와 교육적 기능을 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고 선조의 정신을 후대에 길이 계승 발전하는 구심점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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