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역사문화 신지식인)

 세계최대 금성 고분의 중요성은 금성사상에 의하여 해외로 진출한 역사적인 사건을 입증하는 것으로, 중남미 금성문화 제국들과 족보를 대조하여 되찾고자하는 유적이다.

23회 연재에서는 백제의 태양새 숭배사상에서 해가는 길인 동쪽으로 집단이주하여 금성의 제국을 일본 아스카 지역에 세운 것과 같이 멕시코지역에도 나라를 세운 신(神)의 길을 알게 되었다.

신이 준 약속의 땅 성지를 찾아서 집단이주한 것은 그 당시의 신은 태양이며, 해가는 길을 찾아서 백제인 들이 진출한 곳이 멕시코 지역이다.(지금의 동서방향보다 시계방향으로 기울어진 고대의 방향)

유일하게 백제의 동쪽인 멕시코시티 주변 지역에 금성의 문화가 밀집 되어 있고, 여러 차례 집단 이주한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것은 약속의 땅을 찾아서 장구한 세월동안 시차를 두고 이주가 진행된 곳이다.

중동의 예로서 메소포타미아 우르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찾아서 해가는 길의 서쪽, 가나안 성지로 찾아간 것과 같다. 이스라엘 인 들이 원래 살았던 우르 지역의 동쪽은 산악지대와 사막으로 이어진 곳으로 해가는 길의 서쪽이 미래의 성지로 신이 준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게 된 곳이다.

천 수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성지를 찾고자 주변국들과 전쟁을 할 만큼 신의 계시를 중요시 하였다. 만주 추운지방에서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부여족 들은 보다 더 따뜻한 해가 뜨는 방향으로 이주하려는 욕망과 태양숭배 신앙의 성지를 찾고자하는 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신천지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이 상승 고취 된 멕시코 이주의 역사는 여러 차례 이루어 진 것으로 금성의 문화를 갖고 간 사람들의 정착한 시기도 백제시대로 나타나고 있다.(다음호에 설명)

멕시코 원주민 들이 집단 이주하기 전에 살던 곳은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삼국시대 성행한 무덤이기에 시대성을 알 수 있다.(<그림 2> 참조)

본 연재내용은 백제시대 얼마나 많은 집단이주가 이루어 졌는가를 여러 문헌을 근거로 살펴보기로 한다.

멕시코 국기에 그려진 건국과 관련된 독수리와 뱀이 정해준 성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멕시코 국기에 표현 될 만큼 전해지고 있는 건국사상이다. 중동의 상하 이집트의 대표적인 상징 동물인 독수리와 뱀, 크메르 신화의 독수리와 뱀 모두 태양과 금성 문화에서 분화된 것이다.

동양에서 백제를 유일하게 맹금류인 매로 지칭하였다는 기록은 아즈택 족이 남미로 이주하여 독수리(남미는 독수리의 서식지임)가 뱀을 물고 앉은 자리에 도읍지로 정했다는 것과 같다. 즉 백제의 신이 정해준 성지라는 뜻이며, 맹금류인 독수리는 백제의 명칭과 같은 태양새 이다.

 멕시코 건국에서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이야기 중에 샘이 있는 곳이, 신이 준 성지로 인정하고 정착하였다는 샘과 이주지는 가장 밀접한 우리의 문화이다. (왼쪽 그림1은 백제 용봉항로의 봉황)

 백제 하남 왕도의 땅이름이 ‘샘재’이며, 춘천 맥국의 왕도는 ‘샘밭’이다. 우리문화에서 나라의 명칭에 ‘우물담 한(韓)’자를 사용하는 것은 우물이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경주의 중심에 있는 첨성대는 우물을 지상에 올려놓은 것과 같으며, 백제는 부여의 도시 중심에 궁남지(宮南池) 연못을 인공으로 조성하였고, 백제 한성시대도 궁남지를 조성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치챈이트사 의 고대 도시 명칭은 마야어로 ‘우물가의 집’이라는 뜻이며, 유카탄 최대의 성스러운 우물 세노테(cenote)는 샘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영한 것에서 유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건국 내용에서 자칫하면 흘려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배를 이용하여 집단으로 항해 이주하였다는 내용이다.

처음부터 배를 타고 집단이주 하였다는 내용은 멕시코를 건국한 원주민들의 이주 역사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는 『보투리니 고문헌』 기록이다.(<그림2 참조>) 규모가 큰 배를 건조하는 기술의 발달과 항해술에 능하고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아야 만이 집단 이주를 할 수 있다.

즉 해양 국가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며, 동양에서도 가장 해양 진출이 활발하고 모험과 정복정신이 강한 국가는 백제이다.

 그 내면에는 금성에 대한 숭배로서, 물의 신(神) 용은 금성에서 발생한 것으로 물의 신이 보호해 준다는 용신의 신앙심에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신앙심이 강했던 것이다. (왼쪽 그림2는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에서 배를 타고 이주한 것을 기록한 그림 이야기(『마야문명』 도록 발취)

 멕시코 집단 이주는 신의 계시를 받은 무당의 선동과 제정일치 사회의 가장 강력한 해양진출의 용감성이 발휘되는 하늘의 용 금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장거리 해양진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사성에서 보면 백제의 해양 진출과 해상왕 장보고와 이순신은 모두 남해안에 해상거점을 두었고 특히 다도해 지역은 해양 항해문화를 촉진하는 곳이다. 이순신도 치우신(蚩尤神 : 금성에서 발생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터에 나아갔다는 것이다.

태양숭배에 의하여 일본의 아스카 지역과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것은 제정일치 사회의 신앙심이 아니면 어렵다. 떠오르는 태양의 동명묘(東明廟)를 가장 숭배한 아침의 문화 백제인 들은 동쪽 해가는 길, 아침의 땅 성지로 찾아가서 나라를 세운 곳이 지금의 맥시코임이 여러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해양진출의 길목이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서에 집단이주의 기록이 없다면 신뢰하기 어렵다.『일본서기』 에는 다음과 같이 백제인 들의 대규모 이주 기록이 있다.

이해 궁월군(弓月君)이 백제로부터 내귀 하였다. 그리고 주하되 “신이 자기나라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귀화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람들이 방해하여 다 가라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일본서기』응신(應神) 천황 14년 2월 (3세기경))

위의 내용에서 120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숫자적으로 많다는 것이며 멕시코로 집단 이주한 사람의 숫자를 학자들은 대략 1만명 정도로 보는 것과 같다. 신라 사람들이 방해하여 가라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집단이주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2년 후에 왜국에서 신라로 군사를 보내 궁월의 인민들을 구출해 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응신(應神) 천황 16년 8월)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집단이주는 모험이 동반되고, 가는 곳마다 고난이 있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백제인 들이 해외로 집단이주를 많이 하였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백제인은 모략으로서 배 삼백척의 사람이 축자(筑紫)에서 살고자 원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허가하는 척 하십시오.

백제가 거기서 나라를 세우려고 하면 반드시 여자와 아이 들을 배에 태워 올 것입니다. 국가로서는 이에 대하여 일기(壹岐)와 대마(對馬)에 많은 복병을 두고서 오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오, 속지 마십시오 모든 중요한 곳에는 굳게 성새를 만드십시요 라고” 대답하였다.(『일본서기』민달천황(敏達天皇)12년(서기 583년) 10월)

위와 같이 백제인 들이 대거 해외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자 한 내용은 백제인들이 배를 이용하여 대 이동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신뢰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 에 이 무렵에 나타나는 각종 백제의 해상활동에서 집단이주를 충분히 뒷받침 하는 내용들이 많다. 중국의 요서지역과 일본으로 백제가 진출한 기록 등이 중국 정사(正史)와 일본서기에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로 이주한 내용과 같다는 것은 300척에 승선한 인구는 그 당시로서는 소국을 세울만한 인구로서 왜(倭)인들로서는 위협이 되었다. 단순이주가 아님을 왜국정부는 판단하고 백제인 들이 이주하는 길목인 대마도에서 죽이려는 계획까지 논의가 되었다.

300척의 인구가 대 이동한다는 것은 배의 건조 기술과 해양 항해 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당나라가 13만 대군으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침공한 것과 대규모 왜의 해군과 전투를 전개한 사실에서 백제시대의 해상 세력들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중남미로 대단위 이동 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몇 사람의 이주가 아니기에 갖추어야 할 문제가 많다. 국가의 묵인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주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대 이동 하는 것을 국가에서 용납 할 수 없는 것은 나라를 버리고 탈출 배신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철저히 통제를 하는 것이 봉건적인 사회의 제도이며, 지금도 국가의 허락 없이는 이주나 입국이 어려운데 하물며 전쟁이 치열한 곳에서 집단 이주를 쉽게 생각 할 수 없다.

철저히 통제하는 제도에서 쉽게 이주나 도망을 하게 되면 국가는 유지 될 수 없으며, 전쟁 때도 배수진을 치고 심지어 바다까지 지키고 통제를 하였기에 집단이주는 국가의 허락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그 당시 백제는 이미 중국의 요서 지역과 일본의 나라지역으로 진출한지 수백 년이 지난후의 기록들이다. 백제는 22담로라는 분리지배 통치제도 로서 해외 집단이주가 보다 가능 하였던 것이다. 남사(南史) 동이 열전 편에는 다음과 같이 담로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固麻)라고 하며, 읍(邑)을‘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안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남사(南史) 동이 열전: 당나라 때(서기627~649년) 170년간 남조의 정사를 쓴 내용.)

위와 같이 왕의 자제나 종족이 나누어 통치를 한 담로제는 자제 종족이 통치하는 만큼 자율성이 많았다. 또한 일본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여 분봉국을 설치하여 해외 기지를 구성한 전통적인 해외 진출 국가이다.

즉 담로제는 중앙집권으로부터 비교적 재량권이 많고, 해외로부터 이미 진출한 정보가 들려오면서 집단이주를 꿈꾸게 된다.

또한 백제는 만주 부여에서 원정건국(遠征建國)한 집단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욕구로서 담로의 일부가 대 선단을 이끌고 성지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개연성이 많다. 그 이유는 좁은 한반도 내에서 가야와 예맥 국을 포함한 5개국이 각축전을 전개해야 할 만큼 좁은 면적에서 땅 빼앗기 전쟁이 심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집단 이주는, 도망이나 패전으로 인한 집단이주는 있을 수 있으나 성지를 찾아서 집단이주한다는 것은 백제가 가장 성행했던 전통이다.

백제는 해가는 길 동쪽의 일본 아스카 지역과 서쪽의 중국 요서지역으로 집단이주하여 분봉국(分封國)을 세워서 성공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국가보다 집단 진출의 욕구가 강하다.

300척의 배로 집단 이주하려는 시기는(서기 583년) 부여 도읍지 사비시대로 중국과 교류가 많았고 국제 대외 감각의 폭이 넓은 시기이다. 백제인 들이 진출하려는 이 무렵의 중국의 정사 『북사(北史)』 『수서(隨書)』에는 국제적인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신라, 고구려, 왜 등과 중국 사람도 있다.”

“ 백제의 서남쪽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북사(北史)』, 『수서(隨書)』 백제편 )

위와 같은 기록들은 해양 항로가 발달한 국가임을 알 수 있는 표본으로 다국적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인 들이 동남아 진출이 뚜렷이 나타나는 여러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자세한 것은 다음으로) 중국측의 사서에는 백제의 대외 진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경계를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른다. 외관(外官)으로는 6대방(帶方)을 두어 10군(郡)을 총관(總管)케 하였다.”(『구당서』 백제전)

『구당서』는 당나라 290년간(618년~907년)의 역사를 서술한 중국의 정사(正史)로서 관에서 편찬한 사서로서 신뢰성이 높은 내용이다. 위의 기록에 월주는 지금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부근으로 상해 아래의 해안지대이다. ]

외관(外官)으로는 6대방(帶方)을 두어 10군(郡)을 총관(總管)케 하였다. 는 것은 해외에 6대방이라는 치소를 두어서 10군을 거느리게 하였다는 것에서 해외 진출이 조직적이고 오랜 세월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의『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집단이주가 가능하다는 것은 기근과 흉년이 들어 사람살기 어려운 기록이 많고 또한 전쟁으로 신라로 집단 탈출하는 사례가 많았다. 몇가지 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봄 여름에 큰 한재가 들어 백성이 굶주려 잡아먹을 지경이고 도적들이 크게 일어나다. (『삼국사기』 온조왕 33년(서기 15년) ) 봄 여름에 큰 한재가 들어 초목이 말라 죽고 강물이 말랐는데 7월에 이르러 비가 왔으나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다. (『삼국사기』 비류왕 28년(서기 331년) )

독산성(禿山城(수원)) 성주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근초고왕 28년(서기 373년) )

9월에 왕은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크게 군마를 징집 백성들은 고역에 시달려 신라로 달아나므로 호구(戶口)가 많이 없어 졌다.(『삼국사기』 아신왕 8년(서기 399년) )

7월에 한재가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신라로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삼국사기』 비유왕 21년(서기 447년) )

위와 같이 백제는 대외 집단 진출이 많았고 또한 살기 어려워서 집단 탈출한 내용도 많다. 특히 한성과 가까운 수원의 독산성에서 집단적으로 신라로 이주한 것은 그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지를 찾아나서는 신의 계시가 있다고 선동을 하면 누구나 앞장서서 참여하고자 할 것이다.

동양 삼국의 문헌에서 백제가 집단 해양 진출한 기록이 유일하며, 백제(百濟)라는 국가의 명칭도 밝은 곳으로 건너가는 해가는 길로 진출하는 천문제도를 지향하는 이념이 강한 국가이다.

백(百)이라는 한자의 글자를 자해하면 극(⚊) 아래 흰백(白)자로서 밝음을 지향하고 나아가는 제(濟)자를 사용한 명칭에서도 국가의 기본 사상을 알 수 있다.

멕시코의 건국지 아스태가 제국 수도 테노치티뜰란 은 도시 전채가 흰색으로 되어 있다.(『우리민족의 대이동』 손성태, 29쪽)

백제인 들이 성스러운 계획도시를 조성하면서 밝은 색으로 조성한 것은 태양숭배 사상에서 집단이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 역사의 기록에서 해양 진출이 활발한 국가는 백제이며, 백제만이 중남미 쪽으로 이주한 유일한 증거가 여러 면으로 나타나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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