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역사문화 신지식인)

 

 민둥산 고분을 파괴하고자 하는 식민사학 정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좌측 그림1은 망우리쪽에 쌓은 장성의 기초유적)

 지금까지 민둥산 고분을 사회단체가 강하게 문제를 삼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한 민족의 총량이 포함되어 있고 한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문화재를 모두 멸실하고자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민둥산 고분을 파괴하기 까지 자신 만만하게 자행한 내용을 살펴보면 엄청난 사건이 전개된 것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수도권 문화재를 못 쓰게 조각이 나도록 분해한 사건이다.

민둥산 고분의 한강 건너편 구리시에서는 고구려 유적이라고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광개토대왕 동상과 함께 고구려 대장간을 만들어 엄청난 혈세를 낭비 하였다. 장기간 지속되었고 거리마다 고구려 기상 운운하면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하남시 쪽에는 오히려 자기 고장의 문화재를 폄하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차산 고구려 왜곡이 가능하였던 것은 한강권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였다는 것을 앞세워서 국민들의 눈을 가리어 왔던 것이다. 그동안 조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또한 문화재를 없애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근 몇 년 사이 뒤 늦게 조사를 하게 되었다.

구리시 아차산 유적을 조사한 결과 왜 다른 나라와는 관련이 없고 고구려만의 유적인가에 대한 구분 짓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구리시 일대를 조사한 결과 아차산에서 망우리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길게 쌓은 장성(長城)의 유적이 (그림1)과 같이 남아 있다. 장성은 도읍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길게 울타리처럼 차단하는 성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엄청난 공력으로 쌓을 수 있는 변방의 성은 아니다.

아차산 일대의 땅이름이 ‘아치울’이며 조선 초기에 ‘망올리’라고(세조실록(세조9년 1463년) ‘망올리(芒兀里)’) 하는 것도 울타리 장성을 뜻하는 것이다. 아차산과 연결되는 군사시설은 대모산성~몽촌토성~풍납토성~아차산성~용마산~망우리 장성(長城)으로 연결되는 일직선의 방어선이 조성되어 있다.

군사성의 배치에서도 몽촌과 풍납토성은 왕성을 보호하는 군사성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식민사학은 지금도 일본 학자들이 왜곡한 백제사 축소를 답습하고 있다. 지금까지 장성의 거대한 유적이 남아 있음에도 전혀 거론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얼마나 의도적인 왜곡인가를 알 수 있다.

 오히려 백제 유적이 없다는 것이 이상한 곳임에도 국민들을 속여 가면서 한나라의 수도권 문화자원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 아차산 장성을 고구려 유적이라고 왜곡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풍납토성을 백제의 왕성이라고 주장하였기에 강 건너 아차산 일대를 고구려 유적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장성에 포함된 아차산 보루성의 유물도 모두 백제 초기의 유물이 많고 모든 면으로 고구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차산 장성과 같은 또 하나의 장성은 관악구와 금천구 사이의 호암산 석벽성(石壁城)이다.(그림 2 참조/좌측 그림2는 호암산 석벽 장성)

호암산성을 여러번 발굴하였으나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거나 또는 시대를 모른다고 하는 편이다. 암산성을 일반인들도 보면 알 수 있는 장성 유적을 아차산 장성처럼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유적을 모두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 왜곡하므로 서 한강권 백제의 유적은 몽촌이나 풍납 토성으로 축소 왜곡하고 있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문은 진리 추구에 있으며, 힘이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학문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요인 들이 민둥산 세계 최대의 고분을 파괴해도 된다는 자심감과 집단의 잘못은 먹혀든다는 오판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아차산 보루성 유적과 호암산성 유적에서도 연질 토기와 연질기와가 산재되어 있어 유물에서도 고구려, 신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특히 엄청난 공력을 들여 산을 깎아 절벽이 되도록 한 호암산 석벽성은 신라나 고구려가 변방에 조성할 수 없는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도 불가능한 울타리와 같은 거대한 차단성이다.(좌측 그림3은 금천문화원에서 지적하는 호랑이 머리 바위산)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의 한우물도 백제 왕도인 이성산성 저수지와 같은 구조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 이외 석구상(石狗像)이 백제시대의 작품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호암산이라는 산의 명칭도 백제시대 사신사상(四神思想)에 의해서 서쪽을 지키는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는 산의 명칭이다.백제시대 사신사상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산으로 호랑이 조형물과 산 모양에서도 호랑이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그림3 참조)

 이와 함께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흰 바위를 가공하여 호랑이 머리 모양으로 만든 것에서 우백호(右白虎)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그림4 참조 / 칼바위 옆에 인위적으로 만든 호랑이 머리 바위)

 처음에는 호암산 석구상(石狗像)의 유래에 대해서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 불이 자주 나니까 불을 방지하기 위해서 해태 상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러나 인근 한우물인 저수지를 발굴한 결과 석구지(石狗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어 석구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석구상을 어느 때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 시대 조성한 것으로 안내하고 있다. 석구상이 어느 시대의 유물인가를 밝힐 수 있는 내용이 이성산성에 남아 있어 백제시대의 작품임이 확인 되고 있다.

이성산성의 성 돌을 옥수수 알처럼 가공한 백제인 들이 돌을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백제시대의 작품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석구상 엉덩이에 4개의 별자리 성혈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그림5, 6 참조)

 이와 같은 별자리가 하남시 이성산성 남문지 거북바위에서도 발견되었다.(좌측 그림5는 석구 엉덩이와 뒤편 바위에 세겨진 별자리)

 • 호암산성 석구는 성 입구를 지키는 위치에 있으며, 이성산성 거북바위도 남문지 입구에 조성되어 모두 성 입구를 지키는 것과 별자리 조성도 같다. 이성산성 거북바위를 발굴하고도 보고서에 빼버린 것은 백제 초기 이외는 달리 설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 무령왕릉의 석수(石獸)도 같은 뜻에서 무덤을 지키는 지킴이이다.

• 강동구 강일동 백제시대 금성분에서 석구가 발굴되었고,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신사 앞을 지키는 고마이누(神犬)와 호암산 석구와 모두 동일한 뜻이다.(죄측 그림6은 석구 엉덩이에 세겨진 별자리)

• 천문에 의한 별자리를 새기는 것은 불교 유입 이전 백제초기 자연 숭배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나 조선시대는 성혈을 새기지 않으며, 백제시대 개를 지킴이로 조성한 것과 동일하다.

 • 호암산성 석구의 별자리에서 2.1m 뒤편에 4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바위(그림5 참조)가 있어 석구의 별자리와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다. (좌측 그림6은 석구 엉덩이에 세겨진 별자리)

 이러한 연관성은 이성산성 거북바위 별자리 동북쪽에 별자리 바위가 있는 것과 동일하다.

• 호암산 석구상은 일본 ‘고마이누(神犬)’의 원조로서 암사동 금성분의 석구와 함께 백제의 전통성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시대 이후에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석구상을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백제시대의 석구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호암산성은 다른 시대도 사용할 수 있으나 장성과 유적 대부분이 백제시대로서 왕도의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축성이다.

 위와 같이 호암산 장성을 조사한 결과 현재 유적이 남아 있는 구간은 독산 3동~목골산~호압사~한우물 ~ 석수역으로 가는 산 능선까지 약 6km 구간에 성터와 보루성과 봉화터 유적 등이 산재되어 있다.

민둥산 고분과 함께 수도권의 백제유적을 하나의 단일 문화권으로 조성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남시 백제왕궁지와 이성산성, 천왕사, 동사지, 검단산 유적과 세계 최대의 고분과 아차산 장성 호암산성과 석촌과 방이동 고분군, 그 이외 한강 권 주변에는 수많은 백제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다.(좌측 그림7은 호암산 백제시대의 석구)

 식민사학에 의하여 민족의 자긍심이 포함된 유적의 파괴는 물론 경제적 피해는 더욱 크다.

 국민의 세금으로 식민사학을 양성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후손으로부터 지탄을 면 할 수 없다.

식민사학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각성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저해하는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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