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종섭 백제문화연구회장/역사문화 신지식인

전방후원분을 두고 그 동안 일본 열도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을 하였는가를 살펴보면, 크게 파문을 던진 이야기는 일본열도 기마민족 정복설이다.(왼쪽 그림1은 일본의 사카이지역에 있는 전방후원분)

 일본 학계에 크게 파문을 던진 학설은 일본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일본열도 기마민족 정복설을 주장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전방후원분을 조성한 고분시대보다 앞선 시기는 야요이 시대로서, 유물로는 거울이나 칼이 출토되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면이 많은 시대였다.

 야요이 시대 이후에 갑자기 전방후원분의 거대 고분이 발견되면서 부장품으로서 마구와 무기가 등장하므로, 왜 급속하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었던가에 대하여 의문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의문이 있었던 차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일본 열도 기마민족 정복설이다.

이러한 학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8년이며 ‘에가미 나미오’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북중국과 내몽고 일대 고고학 연구에 참여하여 기마민족이 중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가미 학설의 일본 열도 기마민족 정복설의 내용을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5호16국(서기304〜439년)이라는 여러 나라가 난무하는 혼란기에 오호민족(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이 화북 지방에서 이동을 하여 퉁구스계 진(辰)왕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밑에 있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와 북규슈 를 정복하고 일본의 슈진천황 4세기 말경에 기내 지방을 정복하였다는 설로서 그 인물이 오우진천황 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였다. 대략 이러한 줄거리가 기마 민족 이동설로서 일본 전역에 크게 이슈가 되어 한때 파문을 일으키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에 세계에서 제일 큰 무덤(인덕천황릉)을 조성한 고대 집단이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이는 분명히 일본의 토착 민족이 아니고 부장품에 칼과 마구류가 포함된 외형이 거대하고 그 이전 까지 없었던 전방후원분이라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고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선진 문화를 가진 기마 민족의 부장품이 출토되기에 기마민족 정복설이라는 학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기마민족의 부장품이 전방후원분에서 갑자기 출토되면서 일본열도를 정복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방후원분이 백제의 전통에서 발생한 고분으로, 백제의 기마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하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유적이 세계 최대 규모의 민둥산 고분이다.

민둥산 금성분은 백제의 기마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한 묘제로서 군주의 대표적인 무덤에 속한다. 기마민족 일본 정복 설은 50여년동안 파문이 되어 여러 학설이 가지를 치기 시작 하였고 또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전방후원분이 발굴이 될 때마다 더욱 학설에 힘을 받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나주나 영산강 지역에서 전방후원분이나 또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한 것이 나올 때 마다 일본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지역이라면서 자기네 들이 다스린 땅이라고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 학계는 백제초기 한강권에는 전방후원분이 없다는 학설이 고착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파견된 독립된 세력이 한반도에 존재 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학설은 어떤 면으로든 전방후원분을 일본의 고유 묘제로 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한강권에서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서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잠재우면서 오히려 백제의 기마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하였다는 것을 입증한 결과가 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식민사학만을 추종하던 사람들로서 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기에 민둥산 고분을 없애고자 치밀하게 팔각과 삼각 형태의 흔적을 몰래 지우려고 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에가미 학설대로라면 만주의 북방 지역에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전방후원분 묘제가 중국에서 발생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최근에 한반도에서 금성분(전방후원분)이 발생하였다는 원초적인 선사시대의 증거가 확인되므로 서 한국의 고유 묘제로 밝혀지고 있다.(차후 저서나 언론을 통하여 발표할 예정임).

예로서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특이한 형태의 부여족 무덤이 발견 되었다. 부여족이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 하였기에 이들이 죽은 후에도 부여의 방식대로 무덤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무덤은 보수성이 강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철학이 포함되어 있기에 처음에는 작은 규모에서 서서히 시작을 하면서 점차 확대가 된다.(왼쪽 그림3은 인천 서구 감포2동 장구산고분)

 기마 민족이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정복한 왕이 전방후원분이라는 거대한 고분을 사용하였다면 진출하기 전에 있었던 지역에도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어야 하므로 그 증거가 민둥산 고분이다.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의 발생과정을 오랫동안 연구를 하고 수많은 논문이 나왔지만은 발생과정을 밝히지 못했던 것은 그 원류가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달 과정의 관련유적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금성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전방후원분의 성격이나 발생 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관계로 고분의 명칭 까지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인 명칭보다 학문적인 명칭은 정확성이 있어야 하지만 지금까지 발생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맞지 않은 이름을 지은 것이다.

 국내에서는 장고처럼 생겼다 하여 장고형 고분이라 하며, 한강권에는 이러한 고분이 많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적으로는 <그림 3,4>와 같이 인천 서구 감포에서 발견된 장구산을 조사한 결과 금성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그림4>와 같이 주위에 물을 채우는 해자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 세밀하게 조사를 하게 되면 많은 곳에서 금성분이 발견 될 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계 최대의 민둥산 금성분은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한 맹주국의 유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일본 학자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해석에서 비추어 보면, 백제의 기마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일본이 군국주의로 부활하기 위하여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민둥산 고분이 주는 교훈은 일본 열도를 정복한 백제 기마민족의 정복정신을 이어 받는 순례의 장소로서 긴급히 조성되어야 할 유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독도문제에 대응하는 정신적인 무장의 장소로서 제일 적합한 곳은 일본을 정복한 군주 무덤인 민둥산 고분이다. 일본열도가 두 번이나 정복당한 첫 번째는 백제 기마민족의 원정이며 그 다음은 미국의 원폭이다.

피라미드 보다 더 방대하고 포함된 내용이 깊은 인류문명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행위는 지탄을 면하기 어렵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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