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정민채 본지 상임이사

 

 같은 조건이라면, 가벼운 배일수록 더 빠를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뱃사람들은 배 밑바닥에󰡐밑짐󰡑이라 부르는 일정무게의 짐을 항상 실어둔다. 밑짐이 든든한 배는 풍랑이 거센 때라도 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고난(苦難)한 환경을 인생의 밑짐으로 삼고 살아가면 어떨까?

 여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 ‘정 주영’ 씨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그 사람인가. 그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맨주먹으로 한국 최대․최고의 기업을 일으킨 전설이기 때문이다. 남다른 부지런함과 신용으로 아주 불가능해 보이는 일마저도 끝내 성공시킨 무서운 집념의 사나이다.

 국내․외 건설사업, 자동차 산업, 세계적 조선소․병원․시멘트공장 설립, 간척사업, 금강산 관광, 대학설립 등 그 당시로는 남이 생각지도 못한 일 등을 이루어 냈다. 수많은 일자리 창출과 외환보유고가 부족할 때 국가를 도운 것은 물론, 해외에 국격(國格)을 드높인 인물이다. 마침 그의 선영과 묘소가 하남에 있기에 더욱 남다르게 느껴진다.

요즘처럼 서민들이 살기 어려울 때 독자들에게 그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정주영의 생애는 1915-2001년이다.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 출신이다. 가난한 농가의 육 남 이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노동은 열 살 무렵쯤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하신 것처럼 “그가 동생들을 책임지고 혼례 시켜 분가시키려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씀하셨다. 어려서부터 새벽 4시께면 자는 아이를 깨워 시오리 길 떨어져 있는 농토로 데리고 나가셨다.

14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고되고 힘든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힘든 노력과 시간, 흘리는 땀방울’에 비해 농사는 성과가 너무 적었다. “차라리 공사판에 가서 노동으로 돈을 벌어다 개간할 필요 없이 어엿한 농토를 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어라고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는 배고픈 농촌생활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두 번째 가출 모두 실패하고 붙들려 돌아왔다. 세 번째 가출은 서울에 가서 부기학원을 다닐 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소 판 돈 70원을 몰래 가져갔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다시 고향 통천으로 귀향한다.

네 번째 가출로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지옥이었다. 하루는 다 같이 꾀를 써서 밥상위에 올라가 자기 시작했는데, 잠시 뜸한가 싶더니 이내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가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다리를 타려하다가 양재기 물에 익사하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쾌재를 부르면서 편안히 잔 것이 하루나 이틀쯤 되었을까. 다시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불을 켜고 무슨 방법으로 양재기물을 피해 올라왔나 살펴보았더니 빈대들은 네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뚝 떨어져 목적달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를 뛰어 넘으려 저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제 뜻을 이루고 있었다. ‘빈대에게서 얻은 교훈’은 그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열등감과 불우한 환경을 감추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성취의 동력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면 어떨까? 그러한 시련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인생의 풍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힘든 고통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아 인생을 값지게 사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이러니 살만한 세상 아닌가. 고생하는 사람을 무조건 불쌍하다고만 여길게 아니라, 적절한 동기부여와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

하남신문 news@ehanam.net

 

저작권자 © 하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