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지 씨…‘제3회 셀라문학상’ 최우수상

 “전문 바둑기사들이 단 한 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한 복기(復碁)를 할 수 있는 것은 왜 바둑알을 그곳에 두는지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돌들만 살아남는다는 것, 이것은 바둑판에만 국한된 법칙이 아니다. 인생이란 거대한 바둑판이요, 우리가 사는 매일매일은 그 바둑판 위에 두는 돌과 같기에, 얼마나 살았느냐에 상관없이 결국엔 의미를 지닌 날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엄마께서 선물해주신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복기(復碁)란 바둑이 끝난 뒤 양 대국자가 서로의 잘잘못을 되짚어보기 위하여 방금 두었던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풀이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 종일이 소요되고, 250~300여 개에 이르는 돌들의 순서를 전문기사들은 정확하게 기억하며 복기를 행한다고 한다. 글쓴이는 바둑판에서건 인생사에서건 의미 있는 돌들만 살아남는다고 했다. 바둑판에서 그러하듯이 인생사도 삶을 이루는 각 돌들이 갖는 의미로 연결되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일은 내가 인생에 둔 첫 번째 돌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과연 의미 있는 돌을 몇 개나 두었을까. 이 돌, 저 돌 아무런 의미 없는 돌들을 그저 내던지고만 있지 않았나. 얼마나 최선을 다해 내 삶에 돌을 두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고요한 바둑판과 달리 인생은 꽤나 시끄럽다. 누구에게나 삶은 치열하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타인에게 치이고, 안으로는 자신에게 던지는 조소와 비하로 인해 수없이 무너진다. 의미 없는 돌들은 마치 알까기처럼 다른 돌에 치여 저 멀리 바둑판 밖으로 떨어져버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심사숙고하며 돌을 두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치열성이 요구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2011년 10월, 문득 책 한 구절을 읽다가 지금의 나에게는 쳇바퀴를 돌리던 ‘치열함’도 ‘사소’한 일탈도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시간에 쫓기고 끌려 다니며 그저 숨 쉬듯 살아가고만 있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나날들 속에 의미 있는 바둑돌은 없고 무기력한 기운만 감돌뿐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주도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어서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마음들만 가득했다. 소중한 하루하루를 너무 무책임한 태도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 친구와 함께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온통 단풍으로 물든 교정을 보았다. 내 입에서 계속 나온 말은 “이렇게 예쁘게 변했는데 왜 이걸 몰랐지, 왜 한 번도 못 봤지”였다. 언덕을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주변이 단풍으로 물들어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자연에게 이렇게 무심한 내가 단풍을 즐길 자격이 있는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 좋아라 웃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소한 것들이 주는 의미’까지 잊어가고 있었다.

의미 없는 시간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제 일, 그저께 일을 생각해 볼 때면 기억나는 일들이 없다. 말 그대로 남는 게 없는 것이다. 벌써 대학생활의 반 이상이 흘렀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시간은 가고 있다. 그런데 ‘의미 있는 돌’은커녕 의미라는 단어조차 잊어가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 삶처럼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내가 책의 한 구절을 통해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불투명한 미래는 어쩌면 우리의 운명이자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길을 알 수 없기에 과거를 딛고 일어나며, 현실을 살아갈 희망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삶의 돌들을 의미 있게 엮어주는 복기(復碁), 삶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복기는 필요한 것이다. 내 삶의 성장과 날갯짓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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