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한양대 법대 교수/조 성 민

 프랑스령인 남아메리카의 기아나 형무소로 향하는 죄수수송선에서 “빠삐용”과 “드가”라는 주인공이 만나 친구가 된다. 빠삐용은 포주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드가는 위조지폐범이었다. 기아나 형무소에 도착한 이들은 중노동으로 혹사당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야만적이고 열악한 감옥생활을 하던 죄수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빠삐용은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검사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드가는 아내에게 당한 배신감 때문에 탈옥을 시도한다. 그러나 첫 번째 탈옥에 실패하여 두 사람은 2년간 독방에 갇혔다가 풀려난다. 이들은 다시 탈옥을 시도하여 콜롬비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숨어 지내다 수녀장의 밀고로 체포된다. 10여 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10번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백발이 된 빠삐용은 죽어야만 육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악마의 섬」으로 유배된다.


 이 섬은 거센 파도가 형무소 쪽으로 밀려오기 때문에 파도를 타고 빠져나갈 수가 없고, 섬 주위에는 악어가 득실거리는 가장 끔찍스러운 형무소였다. 최악의 극한상황에서도 빠삐용은 굽힐 수 없는 자유에의 의지와 탈옥의 실천의지를 불태운다. 오랜 동안 섬 주변을 유심히 관찰한 빠삐용은 야자열매만이 섬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야자열매로 몰래 구명대를 만든다. 어느 날 빠삐용은 수십 길 절벽 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난 여기 살아있다” 고 소리치며 드디어 자유를 얻는다.


 일제강점기 하의 우리나라는 나라전체가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토를 빼앗기고 언어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이 나라의 딸들이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짓밟히고 우리 국민들의 자유가 유린당하는 암흑시대가 도래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자유를 박탈당해 빠삐용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우리민족의 울분이 극에 달했다.


  1909년 10월 26일! 적막을 깨는 총성(銃聲)이 하얼빈 역에 울려 퍼졌다.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 일제침략의 원흉이며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시 30세의 안중근 의사는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러시아와 회담을 하러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우리민족의 얼을 심어주었다. 이 총소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국권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져 있던 우리민족에게 광복을 향한 불굴의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은 국권침탈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정신이며,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민권자유 신장에 바탕을 둔 정신이었다. 안 의사(義士)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동양평화론을 구상하고 이를 집필하는 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저술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동양평화론의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한중일 3국의 중심지가 되는 여순을 중심지로 삼아 동양평화체제를 구축하고, ② 한중일 3국의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며, ③ 한중일 3국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 등이다.

지난 20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우리민족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의거를 일으킨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 모두는 안중근 의사가 품었던 겨레사랑ㆍ동포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고, 동양평화사상을 승화시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조를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한다.


하남신문(www.ehanam.net)


저작권자 © 하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