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고 / 하남역사박물관장 - 허미형

 

 수많은 절터가 남아있는 하남 땅에 언제부터 절이 조영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상으로는 한성기 백제 때인 침류왕 1년(384)에 동진을 거쳐 들어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했고, 이듬해에는 왕이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승려 10명을 두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침류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 발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후속 절차를 추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너무 이른 시기에 사망한다. 바로 한산에 절을 세운 그해 겨울에 사망하고 그 동생이 진사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불교 공인이라는 큰 업적을 세웠으나 2년도 미처 채우지 못한 그의 재위 기간 때문에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병약했던 침류왕이 불교의 힘으로 병을 극복해 보고자 동진에 먼저 청해서 적극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가설이 하나 있고, 신라의 불교 도입과정에서 토속 종교 집단의 반발로 인해 이차돈의 순교 후에야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듯이, 아마도 한성기 백제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도 토속 종교집단과 갈등이 발생했고 그로 인한 정변으로 침류왕이 사망한 것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침류왕의 사후에 아들이 아닌 동생이 왕위를 계승한 점도 그런 가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각설하고, 한성기 백제 수도권역이었던 하남 땅에 삼국시대 불교 유입기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에 절이 건립되고 운영되었다는 기록은 명백히 확인되는데, 아직까지 삼국시대에 창건되고 운영되었다고 과학적으로 확인된 절터는 없다.

개략적인 지표조사까지 포함하면 하남시에서는 17개 소 정도의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추후 정밀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수의 절터가 더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 경기도 31개 시군 중에서 면적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하남 전역에 다수의 절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남역사박물관 고려시대 전시실은 거의 불교 관련 유물 일색이다. 공개 중인 유물을 통해 절 이름을 확인해 보면 동사지, 천왕사지, 약정사지, 자화사지가 있고 패널에 ‘항동 출토’라고만 표시된 유물은 항동에 있었던 미상의 절터 출토품일 것이다. 천왕사지는 객산 자락의 평지에 자리 잡았고 동사지는 금암산 자락을 깔고 있지만 평지 사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대규모 절이 주로 평지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아 이 두 절터가 하남에서는 이른 시기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남 시민이라면 누구나 1991년에 사적 제352호로 지정되고 오층탑(보물 제12호)과 삼층탑(보물 제23호)을 품고있는 동사지(桐寺址)와 함께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세계 최대의 철불을 모셨던 절터로 알려진 천왕사지(天王寺址)를 하남의 대표 절터로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다. 하남역사박물관은 2021년 상반기 특별전을 하남의 불교유산으로 하여 ‘청정(淸淨), 염원(念願)’이라는 제목으로 8월 8일까지 운영하였다. 이 전시에는 그간 일반에 소개되지 않았던 유물이 많이 전시되었는데, 특히 처음 공개되는 동사지 출토 유물이 많았다. 동사지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동사지는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고려시대 절터라고만 확인될 뿐, 그 창건 배경이나 성격, 사역, 중창 및 폐사 시기 등에 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있었던 고적조사를 통해 절터의 두 탑이 처음 보고된 이후 오랫동안 마을 이름을 따라 ‘춘궁리사지’로 불려 오다가, 1980년대 초반에 단국대학교 박물관이 진행한 지표조사 시에 석탑 주변에서 ‘동사(桐寺)’명 기와가 수습되었고, 수도권제1순환도로(구 외곽순환도로) 건설과 관련하여 1988년 일부 구간에 대해서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면서 ‘동사(同寺)’, ‘동사(桐寺)’명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광주 동사지로 밝혀졌으며, 현재는 ‘하남 동사지’로 부르고 있다.

동국대학교 조사단은 동사 일대에서 4개 사역을 확인하였고그 중 제 1사역의 추정 금당지와 2개의 건물지를 발굴 조사하였다. 제 2사역은 제 1사역에서 고골연못까지 이어지는데, 건물지로 보이는 유구에서 제 1사역보다 앞서는 시기의 고식 기와류를 다수 수습하였다. 동국대학교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통일신라기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고식의 기와류라고 한다. 또한 조사단은 제 1사역의 서북쪽 산중턱에 위치한 금암산마애불 인근을 제 3사역으로 보았다. 마애불의 앞부분에서 전실(前室)의 흔적으로 보이는 고식 기와들과 금동불 2구가 확인되었다. 이 금동불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보존처리를 거쳐서 그중 한 점이 이번에 하남역사박물관의 2021 상반기 특별전 도입부에 소개되어 전시를 이끌어 주었다. 제 4사역은 오층탑의 동쪽 산록에 있는데 주로 둥근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청동불구(靑銅佛具)가 대량으로 도굴되었다가 국가 귀속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 및 보존처리 되었다가 어렵사리 이번 하남역사박물관 특별전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불교 의례 용구가 일괄 수습되어 일반에 공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동사지로 알고 있는 제 1사역에 들어서면 신라 양식의 삼층탑과 고려 초기 양식의 오층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두 탑은 온전한 외형에 수준 높은 조형미를 갖춘데다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걸치고 있어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깊은 감동을 느끼며 주변을 오래 서성이게 된다. 1965~66년에 해체 수리 후, 2000년에 지반보강공사를 위해 다시 완전 해체 수리를 거친 삼층탑은 얼핏 봐서는 신라 양식의 석탑으로 보이는데 해체 수리 과정에서 잔돌 속에 묻혀있던 2중 기단이 확인되면서 후기 신라 양식을 담은 고려 초기 석탑이며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사역에서 이전되어 현재 위치에 자리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의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가구식 이층기단을 구비하였고 세부 치석과 결구 수법 등이 이전 시기에 형성된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구도와 외관에서 고려 초기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사단은 오층탑의 현재의 위치를 원위치로 보아 금당과 함께 주축선을 이룬다고 판단하여 제 1사역은 고려시대의 단탑형 가람으로 보았다. 오층탑 역시 하층 기단 면석과 갑석의 들뜬 상태가 확인되어 1965~66년의 삼층탑 해체 수리 시에 함께 해체 수리를 거친 상태이다. 두 탑의 건립 시기를 구분하자면 아마도 삼층탑이 더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금당터로 추정되는 건물지 역시 상당한 규모로 파악되었다. 내부에 불상을 모셨던 구조로 보이는 팔각대좌의 크기가 거대하고 수습된 소조불의 나발 조각 역시 커서 상당히 큰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습된 막새기와 중 일부가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었는데, 그 무늬와 마감의 선세함이 통일신라기의 막새기와류에 못지않다. 이처럼 큰 금당과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두 석탑이 세워졌던 동사지의 존재는 고려시대 당시에도 이 지역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조사자였던 문명대교수는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동사가 900~950년경에 창건, 혹은 중창되었으며 그 발원 세력으로 천왕사의 발원 세력으로도 거론되는 광주 호족 왕규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론도 제기되었다. 왕실 후원이 있어야만 동원이 가능한 일급 석공이 제작한 조형미 넘치는 오층탑을 갖춘 대형 가람을 지방 호족 집안 단독으로 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도 고려 왕실이 조성 주체가 되고 조력자 정도의 역할을 왕규나 혹은 이후의 호족 세력이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고려시대 초기에 광주라는 지역이 지금의 고양시까지 포함한 지명 그대로 광대한 지역이어서 광주 호족 왕규가 꼭 이곳 하남을 근거지로 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해서 최근에는 양근군의 함규(咸規)가 후에 고려 왕실에서 사성(賜姓)을 받아 왕규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광주가 왕규의 근거지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업무상 몇 번 방문했던 안성의 봉업사지에도 퇴락한 신라 양식의 삼층석탑과 고려 초기 양식의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절터의 석탑에서도 동사지 석탑에서 보이는 당대 최고 석공의 자취가 느껴진다. 봉업사 터에는 통일신라기에 화차사(華次寺)라 불리던 절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고려 왕실에서 봉업사라 불리는 큰 절로 중창하였다. 왕실 발원의 단탑식 가람인 봉업사에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모신 진전(眞殿)을 짓고 고려시대 말까지 제사를 모시며 진전사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지역은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봉업사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 큰 규모였을 동사 역시 호족 세력보다는 아마도 고려 왕실에서 발원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재 동사지는 시굴에 이어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데, 동사지에 대해 우리가 모르던 많은 내용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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