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고/하남역사박물관장- 허미형

 하남은 한성기 백제의 수도권역이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한성백제의 도성 유적이 하남시 어디에서라도 확인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이전까지는 딱히 한성백제 유적이라고 할만한 유적은 광암동 고분 등 소수의 석실분 몇 기에 불과하였다.

하남시 공공주택 확충을 위한 개발사업으로 추진된 하남 감일 공공주택 조성공사와 관련하여 2014년 말부터 사전조치로서 문화재 조사 전문 기관인 (재)고려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문화재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지표조사를 통해서 고려시대 석곽묘나 조선시대 건물지 등의 유존을 확인하고 시작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성기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다수 확인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문화재청과 학계는 물론 하남 시민단체의 관심이 유적에 집중되었고 언론에서도 그 성과를 크게 보도하였으며, 국내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국외 연구자의 관심까지 집중되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석실분이 원형 그대로 땅속에 보존된 이후 도굴되지 않고 무려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 지역에서 무려 50여 기가 넘게 그 존재를 드러낸 데에 있다.

이로써 그간 학계에서 확신하지 못해왔던 한성기 백제의 석실분 도입과 발전과정 등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인근에 있는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에 잔존하는 석실분들이 후대의 재활용 및 훼손 등으로 인하여 한성기 백제인이 조성한 석실분이라는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지 못해온 상황이었는데 감일지구 석실분의 발굴조사로 인하여 인근의 석실분 역시 한성기 백제인들이 조성하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감일동 석실분은 이제까지 한성기 백제의 유적으로는 유례없이 큰 규모의 매장유적으로서, 횡혈식석실묘 52기와 수혈식 석곽묘 2기가 조사되었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170 여기 정도 조사된 한성백제 석실분 숫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이다. 횡혈식(橫穴式)란 묘광을 측면에서 파고 들어가 묘실을 조성하는 방법을 말한다. 재지 세력으로서 성장해 오다가 한성백제라는 정치세력에 포함되면서 중앙의 사여품(賜與品)을 받아 세를 과시했던 화성 마하리나 천안 화성리 등의 지역처럼, 한성기 백제에 해당하면서도 이전 시기인 원삼국기 묘제와 이후의 변천 과정이 확인되는 유적과 비교해서 이들 횡혈식석실분은 그 발견 양상이 다르다. 원삼국기 분묘와의 연결 없이 돌연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곳에 매장된 사람들이 감일지구에서 원삼국 이후 오랜 기간 기거하며 발전해 온 집단이 아니라 외래계 이주민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인근의 성남 판교 개발 당시 확인된 백제 석실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감일동 석실분의 형식을 간단히 살펴보자. 낮은 구릉의 남사면에 입지하고, 묘실이 지하에 위치하며, 오른쪽으로 치우친 연도(羨道), 할석을 이용해 벽을 쌓은 점, 장방형 평면에 배부름 벽이 존재하는 점, 변형 궁륭형 천장을 갖는 등 전체 고분의 구조와 형태가 비교적 균일하며 묘실에서 시작되는 배수구가 딸린 고분이 많고, 일부 고분에서는 벽에서 회칠이 확인되는 점도 주목된다. 출토유물 중 목재의 결구에 사용되는 꺾쇠와 방두정이 다수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목관을 사용하여 묘실의 장축방향을 따라 안치했을 것으로 본다.

성남 판교에서 조사된 백제 석실분 역시 당시 조사된 모든 석실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감일지구 석실과 동일한 양상이다. 이처럼 고분군의 구조에서 공통되는 형식이 확인되는 것은 고분 조성 시 나름의 규율이 집단 내부에 강력하게 작동했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고분의 축조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가 되고 있다.

출토유물 중, 2점의 소형 부뚜막형 모형토기가 보이는데, 권오영교수는 소형 부뚜막형 모형토기를 부장하는 풍습을 조성집단의 내세관과 연결하였다. 중국에서 비롯해서 동북아에 널리 퍼진 황천국 관념으로, 부뚜막형 모형토기의 부장은 무덤 안에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는 죽은 이가 황천국의 음식을 먹은 것으로 판단되어 이승과의 인연이 단절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국내의 한성기 백제 석실분에서 이 소형 부뚜막형 모형토기의 출토 사례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일본 학자들은 근기(近畿) 지역의 소형 부뚜막형 모형토기 부장 석실묘를 백제계로 연결하기보다는 중국 한묘와 낙랑 등지의 부장묘와 연결해왔는데, 이번 감일지구에서 소형 부뚜막형 모형토기가 출토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성백제기 분묘가 대개 그렇지만 감일동 백제 석실분은 비교적 박장(薄葬)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토기류가 부장되기는 했지만 직구호 등 기종이 제한적이고 수량도 많지 않다. 금속기의 부장은 더 적다. 철제 무기와 마구 및 공구는 찾아볼 수 없고 무기로는 동제 노기(弩機)가 1점 있는데, 이는 중국 남조산일 가능성이 높다.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에 기록하기를, 백제 비유왕[餘毗]이 방물을 바치며 대사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은 것을 알리고, 표를 올려 역림, 서림 등의 점술서와 ‘쇠뇌’ 등 병기를 요구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었다는 내용이 그 근거이다. 그간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왕광묘, 왕근묘, 평양 석암리 제212호 무덤, 정백리 제356호 무덤 등에서 쇠뇌의 부분이 발굴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2004년에 경북 영천의 용전리 널무덤〔木棺墓〕에서 청동 쇠뇌가 처음 출토된 이후 이번에 하남에서 출토된 것이다.

중국제 도자기인 청자 계수호와 호수호가 출토된 점도 주목된다. 풍납토성 등 한성기 백제 유적에서 중국제 도자기가 보이는 것은 크게 드문 사례는 아니지만, 금관이나 금동신발 등 중앙의 한성백제 왕실에서 사여한 최고급 위세품이 없는 고분군에서 중국산 도자기가 부장되었다는 점은 주목되는 것이다. 한편, 박장인데 비하여 몸에 걸쳤던 것으로 보이는 귀금속은 여러 점 보인다. 누금기법의 금구슬, 반지, 팔찌, 가랑비녀 등이 주목되며 귀걸이와 허리띠는 보이지 않는다. 금동제 관모나 식리, 대금구 등 의례적이고 과시적인 위신재 보다는 일상적인 패용형(佩用形) 부장품 위주라는 점은 감일 석실분 조성 집단이 다독여야 할 지방의 유력세력이 아니라 왕실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세력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중국 남경지역의 동진묘 출토 착장품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 기나이지역 석실묘 중 일부에서도 형식이 유사한 고분이 확인된다고 보고 있어 그 연관성을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향후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한성백제기에 속하는 다양한 석실분의 형식 분류에 따르면, 감일동 석실분은 먼저 조사된 성남 판교 지구에서 확인된 이른바 ‘판교형 석실’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며, 이 형식은 이후 웅진기 백제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 묘역 조성 집단이 한성백제기의 어느 시점에 외부에서 유입되어 한성백제 왕실을 위한 다양한 일을 해 오던 중,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하남위례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왕실을 따라서 웅진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왕도 구역 내 왕성의 지근 거리에서 새로운 묘제 일색의 대규모 고분군을 축조했던 감일동 석실묘 조성 집단이 한성기 백제 중앙에서 어떤 위상과 성격을 가진 집단이었으며 이처럼 새로운 묘제를 채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소위 ‘판교형 석실묘’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반도 서북지방의 낙랑과 대방, 동진의 전실묘를 주목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감일동 석실분을 포함한 판교형 석실분을 수용해 축조하고 매장된 집단의 외래적 정체성과 관련된다. 즉, 낙랑과 대방 등에서 이주해 어렵사리 한성백제 도성 인근에 정착한 집단이, 선진 문물에 밝은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외교와 재무, 문한(文翰) 등의 직능을 수행하며 왕실에 기대어 보좌한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감일지구 석실분이 발견된 구역은 지구 내에서도 중심상업지구에 해당하던 요지이다. 사업 시행 기관인 LH로서는 중심상업지구로 설정했던 이 구역을 양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와 하남시, 시민사회 등과의 협의에 따라, LH는 설계를 변경해 유적공원과 박물관을 건립해 하남시에 기부채납(寄附採納)하고 하남시는 또 하나의 박물관 운영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갈등과 협의, 그리고 양보가 있었을 것이다. 현재 하남시는 LH 및 관련 전문가 그룹, 시민대표와 함께 유적공원과 박물관 건립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향후 감일지구 백제 고분 공원과 박물관이 훌륭한 콘텐츠를 갖추고 개관하여 인근 주민들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양한 세대를 위한 교육 공간으로, 그리고 한중일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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