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고/하남역사박물관장- 허미형

 하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여러 곳이 있다. 선사시대 하면 떠오르는 미사리유적이 있고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성산성이 있으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했던 동사지와 천왕사지 등 여러 절터와 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했던 관아 유적이 있다.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향교와 서원 역시 분포하고 있어 선사부터 지금까지 늘 사람이 생활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여기 하남이다. 그 모든 유산이 우리에겐 특별하지만, 이 글에서 언급할 유산은 이성산성과, 그곳에 머물면서 치열한 삶의 한때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필자의 상상을 더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성산성은 한성기 백제의 주요한 유적으로 추정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1985년에 경기도 내 분포하는 백제유적에 대한 전면적인 지표조사가 진행되었고 그중 이성산성이 주요한 한성기 백제의 유적으로 추정되어 1986년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이후 2019년 14차 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유적에 대해, 중앙정부도 아닌 기초자치단체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하게 학술발굴조사를 추진해서 비지정 문화재였던 곳을 국가사적으로 만들고 명소로 가꿔온 사례는 많지 않다. 아마도 이성산성이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한세대가 바뀌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시민사회가 꾸준하게 성원했고 그 성원을 행정적으로 뒷받침 해온 하남시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하남 지역은 한성기 백제의 하남위례성 수도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불과 7일 만에 백제 방어선이 뚫려 도성이 함락당했고 개로왕은 탈출 도중에 참수되었으며 그 아들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해 웅진기 백제를 열었다. 이후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을 설치하였다.

절치부심 끝에 백제 성왕은 빼앗긴 한강유역을 수복하고자 신라와 연합했다. 551년,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개군은 신라에 넘기고 한강 하류역 6개 군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하류역까지 차지한 이후 이곳을 신주라 하여 영역화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신주의 치소성으로서 이성산성을 지목하고 있다. 이후 여러 번에 걸친 주 명칭의 개칭에 따라 사서에서는 이 지역에 대해 한산주, 한주, 한성 등 명칭이 혼용되는 경향이 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는 것이 위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무력은 우리가 아는 김무력, 바로 김유신장군의 할아버지다.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자 김무력이 신라의 장군으로서 한강 유역에 새로 확보한 신주의 군주로 입성한 것이다. 아버지 구형왕이 항복한 이후 신라의 진골로 편입은 되었으나 가야계 진골의 입지는 경주 출신 귀족들에 비할 바가 못됐을 것이다. 그러나 김무력은 명장 이사부(異斯夫)를 도와 두각을 나타내면서 신흥 무장으로서 발판을 다졌고 이사부 버금가는 화려한 군공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을 것이다.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18세가 되던 551년,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고 품계가 낮은 젊은 장수들을 대거 중용하는 등 군 수뇌부에 대한 세대 교체를 단행해 김무력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김무력은 신주의 군주로서 새로 획득한 영토의 방어를 위한 관방시설의 설계와 축성에 나섰을 것이니, 할미산성 등 한강 유역 초기 신라성의 대부분이 아마 김무력장군의 기획에 의해 축성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성산성은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인 신주의 치소성으로 그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을 것은 자명하다.

같은 책 권 제4 신라본기 진흥왕 555년 10월에 ‘북한산에 순행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새로 확장한 영토에 대해 왕이 몸소 점검에 나선 것이다. 경주에서 신주를 거쳐 한강 건너 북한산에 이르는 당시의 주요 경로를 살펴보자. 왕경인 경주와 신주를 왕래하기 위해서는 상주를 거쳐 계립령, 중원경(충주)을 경유해야 했다. 중원경에서 다시 음죽현(오늘날 죽산 일대)을 거쳐 신주에 도착하면 북으로 한강이 있다. 아마도 진흥왕의 순행길은 이 간선로를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니, 당시의 노정 중 치소성인 이성산성에 당연히 왕의 일행이 머물렀을 것이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은 왕을 모시고 한강을 건너 북한산까지 수행하면서 비봉에 그 순행비를 세우는 작업까지 관여했을 것이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 김무력의 등위는 ‘잡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마운령비에서도 같은 등급으로 진흥왕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김무력은 진흥왕을 보좌하며 각간(角干), 즉 제1 관등인 서불한(舒弗邯)까지 오르는데 568년 이후로 그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진평왕(眞平王) 25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현재의 아차산성)에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 10,000명을 이끌고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내용이 같은 책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14년(603) 기록에도 전한다. 다만 고구려 기록에는 영양왕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을 쳤다고만 전하고, 진평왕 관련 기록은 없다.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치려 했을 당시 그와 그의 군단이 머물렀던 베이스캠프는 역시 치소성인 이성산성과 인근 교산동 일대였을 것이다.

진평왕은 신라 제 26대 왕이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의 아들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했으며 의지가 굳고 식견이 명철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출생과 동시에 왕위계승권을 거머쥔 귀한 신분이었으나 아버지 동륜태자가 즉위 전에 요절하면서 왕권에서 멀어졌다. 삼촌인 진지왕이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즉위했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정란(政亂)·황음(荒淫)하여 폐위되면서 진평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에 이어 관제의 정비를 통해 신라를 성장시켰다. 특히 재위 기간 동안에 삼국 간의 항쟁이 격화되면서 여러 전투에 직접 참전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 북한산성(오늘날 아차산성)에 쳐들어 온 고구려군을 직접 맞아 승리를 거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 7년 9월 ‘문무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본격적인 대고구려 전쟁을 맞아 문무왕이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한산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문무왕은 한강을 건너 평양을 향해 계속 북진하다 고구려 멸망에 따른 당군의 귀환 소식을 접하고 다시 한산으로 돌아온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당시 왕을 모시고 행군한 장군 중 대표적인 사람이 신주의 초대 도독을 지냈던 김무력장군의 손자 김유신이다. 문무왕과 김유신의 관계는 군신관계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 김문희의 러브스토리가 이어준 조카와 외삼촌 사이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이후 이어진 나당전쟁에서도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등 공을 세우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사하였다. 문무왕과 김유신장군 역시 이성산성 일대에서 치열했던 삶의 한때를 따로, 또는 함께 보냈던 것이다.

다시, 같은 책 권 제7 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 12년 가을 8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이다. 본격적인 대당전쟁을 맞아 축성된 주장성은 발굴조사를 통해 그 위용의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거대한 창고 건물과 그 지붕을 덮었던 초대형 기와가 증거이다. 이후 주장성은 전투용으로 기능하였고 이성산성은 행정이나 의례용으로 기능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성산성의 개축 시기와도 부합한다.

이성산성에 머물렀던 인물 중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례도 보인다. 문무왕 4년(664) 1월, ‘아찬 군관(軍官)을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군관은 이후 남천주총관, 한산주도독, 한성주행군총관을 역임하면서 나당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문무왕 20년(680)에는 상대등에 오르는 등 최고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31대 신문왕(681~692)의 왕권 확립을 위한 숙청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른바 토사구팽이었을 것이다. 신문왕은 즉위하던 해에 왕비의 아버지 김흠돌(金欽突)을 비롯하여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하여 관련자까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이 반란 건을 사전에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산주도독을 지내기도 했던 병부령 군관(軍官)과 그 아들을 자살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편 나당전쟁 중, 신라의 지배계층 몇몇이 당의 회유책에 넘어가 이적행위를 한 것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친당 인물로는 수세(藪世)・대토(大吐)・김진주(金眞珠) 등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중 수세는 문무왕 10년(670)에 한산주총관으로 재직한 바가 있어, 이 글에서 소개한다. 수세는 한산주를 관할하는 위치였으면서도 나라를 당에 넘기는 모의 중 주살되었고 이후 수세의 처형을 담당했던 대아찬 진주도 문무왕 15년(675)에 친당 인물로서 사사되었으며, 그 아들 풍훈(風訓)도 당 설인귀의 신라 침공 길 안내를 맡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설총전에 딸려서 부록처럼 김대문(金大問) 관련 기록이 있다. ‘김대문은 본디 신라 귀족의 자제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의 도독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 권을 지었으며, 그의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는 아직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김대문이 한산주의 도독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 중에 ‘한산기’가 있다는 기록이다. 아마도 그가 한산주 도독 시절에 남긴 기록이 아닐까 한다. 현존한다면 많은 의문을 풀어줄 중요한 자료겠지만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

한산주도독을 지낸 김대문은 누구인가? 김대문은 그 필사본의 위서설로 한때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화랑세기≫의 저자로서, 다수의 기록물을 남긴 통일신라의 대표 지성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 여러 곳에서 김대문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당시까지는 김대문의 저서가 존재해서 참조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문이 한산주도독을 지냈던 704년 이후 시기는 이성산성이 행정과 의례 기능 중심으로 개축되던 시기와 부합한다. 특히 김대문이 위화랑 이후 신라 화랑조직을 이끌던 풍월주 집안의 후손이라는 점, 화랑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점 등에서 이성산성의 다각형 건물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은 아닌가 싶다.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오랜 전통이 숱한 세월을 건너 이성산성의 다각형 건물지로 남은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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