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최종윤- 더불어민주당 하남지역위원회 위원장

 분향소를 차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꾼처럼 지나가는 행인들을 봤다. 발길이 이쪽을 향하지 않아도 시청 앞에 없던 몽골천막을 한참 보고 지나가는 분들이 많았다. 호객행위를 하듯 이쪽으로 들어오시라. 이 땅에 사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살다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이희호 여사에게 조문하고 잘 떠나시라 인사하라고 권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입속으로만 되뇌었다.

당직자 분이 첫손님을 개시한 이후로 시도의원과 일반 당원, 시민 분들이 여럿 다녀갔고 분향소를 같이 지키며 말동무가 되어준 가까운 형님 덕에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갔다.

햇살이 뜨거운 둘째날 아침 고령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몸을 이끌고 분향소에 왔다. 부주해야 되냐, 나 글씨 못쓰는데 방명록을 써야 되냐, 날도 더운데 좋을 일 하신다, 내가 이희호 여사와 동년배다 혼잣말로 대화를 하시더니 분향소 중앙에 앉아 마더 테레사 수녀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초상화처럼 두 손을 모으고 한참을 기도했다.

날이 더 달궈진 오후에는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분향소를 찾아 영정 앞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어떤 눈물인지 알고 싶었지만 방명록의 흔적도 없이 눈물을 훔치고 떠나는 여성분을 붙잡고 물어볼 수 없었다. 네 살 배기 딸과 온 젊은 엄마는 아이와 헌화를 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아직 절을 할 줄 몰라 바닥에 철퍼덕 눕다시피 절을 하는 아이의 모습이 세상 예뻐 보였다. 또 마흔을 넘겨 중년이 되어가는 남성분은 대뜸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자란 한인2세이고 어머니에게 광주사태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눌한 말투가 한국말이 다소 서툴러 보였다. 방명록에 영어 이름을 남기고 헌화를 하고 잠시 묵념을 하다 자리를 떠났다.

처음 뵙는 조문객의 가장 진중한 모습과 정성 어린 조문은 분향소를 지키며 상주 노릇을 한 사람에게 주는 큰 보람이었다. 특히 네 분이 다녀간 풍경은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 모두 여성과 관련이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 분이 여성이었고 나머지 남성 한분도 자신의 어머니의 교육과 말씀에 대해 한참 강조하며 말했다. 이전에 고 김수환 전 추기경의 분향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와 비견해 슬픔의 크기를 떠나 이희호 여사의 분향소가 갖는 또 다른 의미였다.

이희호 여사와 동년배라고 밝힌 할머님이 태어난 때는 구한말을 지나 일제 강제 병합이 되던 시점이다. 1920년대 하와이, 러시아로 떠나는 해외이주자가 소집됐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때 신식교육을 받고 짧은 치마에 구두를 입은 신여성이 큰 유행이었다. 이는 빅토리아 후기 시대 이후 나타난 세계적 현상이었다. 물론 모던보이라 하여 남성들 사이에도 일부 유사한 흐름이 일었지만 신여성만큼 유의미한 물결은 아니었다. 이희호 여사도 이 신여성 바람과 무관치 않았다. 신여성 운동은 결혼제도에 이견을 제기했고 남성중심 사회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새로운 가치관을 세상에 전하고 여성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하는 시발점이 됐다.

당시 여성은 일제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 한 번 더 짓눌려 살아야하는 존재였다. 이는 일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도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희호 여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불과 20대 후반에 대한여자청년단을 창설했다. 이후 가족법 개정, 남녀차별 금지법 제정 등 여성인권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고 이를 정부정책으로 실현되도록 노력했다.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최초의 여성이자 국가인권위원회 출범과 결식아동 지원 단체 설립 등을 이끌기도 했다.

살아생전에 갈 길을 잃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저하면 이희호 여사는 ‘더 강한 투쟁을 하세요.’라고 독려했고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첫 대선을 도전할 당시 이 여사는 찬조 연사에서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이희호 여사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여성인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여성정책은 이희호 여사의 덕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이희호 여사는 한국 여성인권사의 산파이자 고 김 전 대통령의 여성의식을 심고 배양시킨 장본인이었다. 이희호 여사의 여성인권사의 출발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개발과 독재 시대를 거쳐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했다. 현재의 미투 운동이 있기 이전 여성 인권의 텃밭을 만든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삶이 이름 모를 동년배의 할머니가 분향소를 찾아 기도케 하고 젊은 여성의 가슴을 울려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애써 어린 딸을 대동해 절을 하며 조문하고 어눌한 말투로 광주에서 아버지를 잃은 슬픈 과거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굳이 꺼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희호 여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분들의 답례이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 한 분 떠났다는 섭섭한 마음이 컸는데 이희호 여사를 추모하고 뒷길을 따르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계시다는 안도감이 든다. 여기 지면을 빌려 분향소를 찾아주신 모든 조문객 여러분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아울러 짧은 일정으로 차마 방문치 못했으나 마음속으로 이희호 여사의 가시는 길에 명복을 빌어준 모든 하남시민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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