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종윤- 더불어민주당 하남지역위원회 최종윤 위원장

 국내 최초의 근대 교량인 한강대교는 불운의 다리였다. 건설 자체도 일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란길에 오른 서울시민을 두고 한국군에 의해 폭파됐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주력부대와 보급품은 물론 많은 시민이 강북에 남은 상태였다. 이는 한국 전사의 오점으로 남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역사가 됐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본디 우리 민족은 다리 건설에 능한 민족은 아니었다. 위로는 북방민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아래로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한반도의 수많은 이름 모를 높은 산과 굽이 흐르는 강, 개천 등은 이를 막는 좋은 수단이었다. 사학자 신정일 씨는 <새로 쓰는 택리지>라는 글에서 “조선의 다리가 유약하기 때문에 말이 끄는 야포 하나를 나르는 데도 주저앉곤 해서 작전이 늦어졌다”라고 전한다. 적이 무기를 들고 진군하다 그만 조선의 약한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는 뜻이다. 만약 튼튼하고 넓은 다리를 강마다 여럿 두었다면 외세의 침략은 더 거셌을 것이다. 다만 작은 내에는 징검다리나 나무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야 한강과 만나는 중랑천 하부에 제법 긴 다리가 놓인다. 왕십리에서 한양대를 지나 성동교를 건너기 이전 시선을 왼편으로 돌리면 돌로 이어진 살곶이 다리가 보이는데 세종 때 짓기 시작해 63년만인 성종 때 준공한 조선시대 최장의 다리이다. 보수공사 후 지금은 누구나 직접 걸어볼 수 있다.

2천3백만 경기도민과 서울시민의 식수원이자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한강에는 이제 27개의 대교와 4개의 철교로 총 31개의 다리가 이어져 하루만 봐도 쉴 새 없이 자동차와 사람이 오간다. 이 많은 다리에 각각의 사연이 깊다. 다리 하나의 건설에만 천문학적인 공사비가 들고 지역주민의 생활권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토건개발시대를 통틀어 얘기한다면 대체로 한강에 다리 놓기는 축복이자 환영받는 일이었다. 자동차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교통체증의 유인은 적은 반면 길목이 많아져 서로 쉽게 만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러하였다.

일면 모든 개발이 환영을 못 받는 것처럼 한강의 모든 다리가 축복은 아니었다. 부실공사와 관리 실패의 온상인 성수대교는 94년 무학여고 학생들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갔고 다리는 아니지만 이듬해 터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국민적 아픔으로 여태껏 남았다.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에 대한 전국민적 사랑은 단순히 택시 드라이버인 아버지의 일이 고달팠다는 점만을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개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 한강의 다리들은 성장의 과실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전쟁통에 국민의 안전과 생명은 뒷전이었다던 한강대교, 개발 이익에 눈이 멀어 부실 공사를 은폐한 성수대교 등 사람과 생명이 뒷전에 밀린 개발의 역사를 사람들은 은연중에 인식했고 그 조건에서 바지런히 살아온 택시 드라이버로 대변되는 개인사에 대해 자녀세대와 부모세대 모두 공감했을 터이다.

최근에 지어진 구리암사대교를 보면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이 현격히 달라진 양상을 띤다. 암사동과 구리시 사이를 연결해 천호대교와 올림픽대교 등에 집중되는 교통량을 분산할 요량이었으나 05년 착공은 06년으로 미뤄졌고 08년 완공은 15년 완공에 이르렀다. 착공이 1년 늦어졌고 공사가 9년 걸렸으니 도합 10년이다. 가칭 암사대교 명칭은 구리시와 암사동의 백병전 양상 끝에 구리암사대교로 결론이 났고 구리는 구리대로 암사는 암사대로 교통체증을 우려해 논란과 후속대책이 이어졌다. 즉 국가주도 개발 사업이 지역주민 및 지역공동체와의 대결로 심화됐다.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반대를 이제는 지역이기주의만으로 간주할 수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시대정신 자체가 국책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지역주민과의 대화를 중시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앞서 말한 구리암사대교의 사례처럼 국가와 개인, 국가와 지역공동체의 위상이 달라졌다. 이를 놓치면 애초 사업의 합당한 타당성마저 전달하기 어렵고 심한 경우 사업 자체의 실패로 이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도로, 철도,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 전 분야에서 이같은 징후가 나타나다. 이전까지 혐오시설로 간주된 납골당이나 쓰레기 처리장 등을 반대한 님비 현상과는 보다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주민조직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60년대부터 주민 중심의 마을 만들기 운동인 마치즈쿠리가 활성화됐다. 8·90년대에는 거대 개발사업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가, 21세기 들어서는 기업·지자체·정부와 파트너가 되어 함께 사업을 진행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즉 국가가 애초에 지역주민을 설득의 대상이 아닌 사업 출발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점이 주요하다. 국책사업의 시작부터 지역주민과 같이 고민하기 때문에 되레 다른 지역주민과의 대화의 빈도도 높아 상호간 이해가 충돌하기보다 해결에 방점을 두고 대안 모색에 주력한다. 상향식 국책사업인 셈이다.

국내 최근 사례로는 주민참여라는 맥락에서 작년 이인영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 개정안'의 의의를 새겨볼 수 있다. 개정안에서 도로, 철도,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사업을 추진할 경우 사업 초기 단계에서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정부와 기업이 맺는 실시협약안 등의 정보 공개를 의무화했다. 때문에 주민들은 사업계획 수립에 참여할 시간과 학습의 기회를 갖게 됐다. 이전까지 민간 기업의 사회기반시설 추진은 지역 주민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고 국민 세금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획이 확정된 것과 다름없는 사업시행 인허가 이후가 되어야 비로소 주민설명회나 공청회 등을 개최했다. 비전문가인 주민은 사업의 취지와 방법을 한참 설명해가며 어르고 달래야할 민원인이 될 뿐이었다. 만약 개정안의 취지를 정부주도의 사회기반시설에도 두루 적용해 나간다면 우린 거대 개발로 인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하남시 미사동과 남양주 수석동을 잇는 가칭 수석대교 논란의 이면에는 달라진 개인과 지역공동체를 포함한 지자체까지의 위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국가 주도 개발 사업의 답습이 자리한다. 지방분권시대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주민을 정책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의견수렴의 시간을 좀 더 가졌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국토부와 하남시, 남양주시, 서울시가 각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머리를 맞대고 후속대책과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끝까지 주민 목소리를 경청해고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노력이 정부여당의 몫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해 사업의 이해관계자인 주민의견을 충분히 두루 반영해 재산권 및 생명안전권 침해의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어디라도 한강에 놓이는 32번째 다리가 결코 불운의 다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남신문aass6517@naver.com

저작권자 © 하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