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백제왕도 (민족사 바로잡기 운동본부 의장, 한 종 섭 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백제라 하면 공주나 부여의 왕도를 알고 있지만 공주는 63년이며 부여는 122년간 있었던 것으로 나머지 493년간은 한강권에서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공주나 부여에 있었던 기간을 모두 합하여도 200년이 되지 않지만  최근 한강권의 500년 도읍지는 어느 곳일까 논란이 되어 왔던 것이다.


 최근 남한산성 발굴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지와 기와장이 발견 되었다고 언론을 통하여 발굴단이 발표를 하고 있다.제대로 판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발표이면에는 숨겨진 사건이 많고, 또한 광주나 하남 시민에게는 자존심을 꺾는 내용이며 크게는 반민족에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나라 발굴은 무엇이며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10여년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기 발굴 사건으로 남해안에서 조작한 거북선 총통 사건이다. 그 당시 거북선 총통을 만들어 바닷물 속에 집어넣고 며칠 후에 건져내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사용하던 거북선 총통이라고 언론을 통하여 한때 떠들썩하게 유물을 공개하면서 세상을 흥분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바닷물에서 건져낸 거북선 총통이 글자도 생생하고 형태가 완연하게 귀함(龜艦)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임진왜란 이라면 400년 동안 바닷물에 잠겨져 있었던 총통이 저렇게도 새것처럼 보존되어 있단 말인가, 의심이 가지만 누구하나 이에 대한 지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 전문가 집단의 병폐의 한 예로서, 다른 사람이 발굴한 것을 제대로 검증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바른말을 하게 되면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누구도 관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더욱 병패가 되는 것은 발굴한 사람이 결론까지 내어서 언론에 발표를 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조서를 꾸미고 재판을 하고 언론에 발표까지 한다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외부의 사람은 누구도 관여를 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 어떻게 보면 발굴자의 전유물처럼 생각을 하고 있으며 특히 발굴지역은 극비처럼 외부 사람의 접근을 막기에 더욱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다.


 거북선 총통의 사기 발굴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이러한 내용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악용하여 사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자신의 발굴에 관여 못할 것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범행은 성공 할 수밖에 없고 또 그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범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 하였던 것이다.총통이 400년간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식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 수 있고 또한 총통의 총구의 내부를 보아도 쉽게 진위를 알 수 있음에도 국보로 지정될 단계까지 되었던 사건이다.


 사기한 것이 탄로가 나게 된 것은 이러한 것을 알고 있는 내부 고발자 가 자신에게 손해가 가는 문제가 발생하자 고발을 하게 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단순 사건이지만 보다 복잡한 사건은 아무리 허위 보고를 해도 일반인 들이 생각을 할 때는 발굴한 사람이 잘 알고 또 전문가 이니까 하면서 믿게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발굴한 것 까지 학자의 양심에서 거짓말을 하겠느냐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생각을 악용하는 것이 사회의 생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이하게 여겼으며, 어떻게 교수가 제자들에게 잘못을 가르치겠느냐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논문으로 한번 주장한 것은 평생 죽을 때 까지 번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식민사학으로는 잘못된 학설이 계속 이어 지면서 조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왜정시대의 관료나 정치인들은 나이가 많으면 사람이 교체가 되지만 논문으로 내려오는 것은 잘못된 식민사학은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어 심지어 조작까지 일어나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들어내고 있다. 


 식민사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발굴을 하였다면 자신이 주장한 논문과 틀린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에서 나왔다면 이를 있는 그대로 발표를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예로서 근대에 와서 한강권 발굴에서 어떤 사건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난 것인가 이에 대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주시 와 하남시 에 몸담아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관심을 갖고 들어야할 내용이며, 우리민족이라면 더욱 귀담아 들어야할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는 일본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두고 다스렸다는 기록이 중국의 정사인 사서나 일본의 일본서기 역사기록에서 입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도에 올림픽 개최관계로 올림픽 공원을 발굴하면서 약 6만평 정도 되는 몽촌토성을 백제의 왕도라고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하여 선전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필자가 고구려나 신라의 도읍지를 살펴본 결과 고구려 평양의 장안성은 약 358만평으로 알려져 있었고 신라는 약 500~700만평으로 도시의 구조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삼국이 비등 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면 왕도의 규모도 같아야 하는데 겨우 6만평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몽촌토성을 백제의 왕도라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쪽에는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어 그 사이에 있는 백제는 2:1로 싸우는 힘의 논리에서도 왕도가 더 커야 하는데 전혀 의심하지 않고 6만평되는 몽촌토성을 왕도라고 대대적으로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이면에는 왜정 시대 주입한 식민사학으로 인하여 시각이 축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도를 찾기 위해서 오랫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1992년도에 하남시에서 백제의 왕도를 찾아내어 발굴한 결과 엄청난 규모의 고대도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남시 고골일대를 발굴하여 고대 도시가 발견되었고 백제의 왕도임을 입증하는 유적들이 속속들이 들어난 것이다.


 그 중에서 백제의 왕도임을 누구도 반론을 할 수 없는 황룡사 목탑(木塔)보다 더 큰 거대한 목탑지가 상하로 겹쳐서 모두 3기나 발굴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적이 발굴이 되어도 최근에는 22만평 밖에 되지 않는 풍납토성을 발굴하여 백제의 왕도라고 근거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몽촌에서 풍납으로 이전을 하였으나 10년간 발굴에서 풍납토성은 왕도가 아님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으로서 2005년 11월에 초대형 고분이 발견되었다고 15일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이 있었다.그 당시 문화재 청이나 기존 식민 사학들은 고분이 아니라고 극구 언론을 통하여 반대 저지를 하였다.


 그러나 시민 단체가 강제 발굴을 하여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고분을 찾아내자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역사 이래 없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동양의 역사를 바로잡는 내용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언론을 이용하여 문화재 청이나 기존 사학계에서 그대로 둘리 없는 것은 한강권에는 전방후원분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인데 그것도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큰 규모의 고분들이 한두 개 도 아닌 무더기로 발견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백제 왕도에 대한 논의는 끝이 난 것이다.


 그 당시에 일본의 학자들도 관심을 두고 확인을 하였던 만큼 일본과 관련이 제일 많은 고분으로 서 일본의 천황 무덤이 전방후원분 양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분의 길이가 770m 680m 등으로 초대형 고분이 발견되어도 숨기고 있는데 백제 왕도나 남한산성에서 근초고왕 때의 왕도가 발견되어도 이를 숨기고자 하는 것은 더욱 별것 아닌 것이 되고 있다.


 그 동안 고대 왕도를 15곳이나 찾아낸 결과 분명한 것은 평지의 도성(都城)과 산성(山城)이 하나의 셑트를 이루어 조성되어 있는 것이 고대 왕도 구조의 철칙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낮은 도성에 살다가 유사시 위급 할 때 는 인근 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백제가 한때는 한산 즉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남한산성을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의 왕도 였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입증되는 유적이 발견 되었던 것이다.


 발굴에서도 백제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굴이 되었고 특히 남한산성의 초기의 성돌은 화강암으로 남한산 일대에서는 나지 않는 돌을 한강건너서 운반해 와서 쌓은 성벽이 발견되었던 것이며, 또한 성 돌을 운반해온 백제시대의 운하가 하남시 덕풍천에서 발견되어 남한산성이 백제시대의 산성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하남시 에서는 신라의 황룡사 보다 더 큰 목탑이 발굴이 되어도 백제왕도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세상에 언론으로 알리지 않을 만큼 은폐를 하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기존의 백제와 관련된 학설이 모두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것이 많기에 지금까지의 논문 자체를 신뢰 할 수 없고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고 대부분이고 보니 가는데 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심 있는 학자라 할지라도 따돌림을 안 당하고 먹고 살려면 조직이 가는 대로 모르쇠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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