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 몽촌토성은 삼국시대 도성규모와 비교도 안돼

 

 배후성인 남한산성, 고구려 환도산성 대성산성과 규모 비슷 

 지금까지 백제의 한성시대 500년 도읍지를 여러 곳으로 지적하면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었던 것은 최소한의 왕도의 규모 등에 대한 기준과 연구가 없어 문제가 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직산의 위례성이나 몽촌토성, 최근에는 풍납토성 등으로 지적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도와 인구 규모를 가늠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 시대별로 영토의 확장과 축소 변화 등이 많으나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한나라의 도읍지는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체성을 가졌고 국력을 상징하는 만큼 왕도에 대한 것은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문헌 기록과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를 기준으로 최소한 기본적인 것을 도출 하고자 한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700년 가깝게 각축전을 전개하면서 대등한 세력권을 오랫동안 형성하였기에 힘의 균형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때는 백제 또는 고구려 신라 등으로 번갈아 가면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힘의 바탕에서는 월등한 격차가 없어 왕도의 비교 연구가 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내용만으로도 어느 정도 예측에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고대 사회는 급속도로 문명이 발달하는 것도 아니고 도시 운영에서도 일정 규모 이상은 제약이 되었던 것으로 교통과 통신 물자 수급통제력에서 한계가 있었기에 일정규모이상을 벗어날 수는 없는 한계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성을 감안한다면 대등한 힘을 가진 같은 시대의 도읍지는 큰 차이가 없는 예측이 가능한 규모라는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삼국시대나 근접한 시기의 왕도에 대한 면적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이 대략적인 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대국가 도읍지의 규모>

 △고구려 : 국내성(압록강) 14만5000평 환도산성(배후산성) 둘레8km

 △고구려 : 안학궁(평양) 11만 4950평 대성산성(배후산성) 둘레 7.76km

 △고구려 : 장안성(평양) 약358만평 → 도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

 △신라 : 경주 서라벌 약500만~750만평 → 평산성

 △백제 : 공주 웅진성 약300만평 → 평산성

 △백제 : 부여 사비성 약500만평 → 평산성

 △발해 : 상경 용천부 489만평  → 평지성

 △고려 : 개경 943만평  → 평산성

 △중국 : 장안성(전한시대) 1000만평, 낙양성(유한시대) 300만평

 △일본 : 후지와라경(AD694) 241만평(16년 재위기간), 헤이안경(AD710-AD784) 965만평(75년 재위기간) (자료제공 중앙대 도시 공학. 강찬석)


 위 나라들의 도성면적은 삼국시대나 근접한 시기의 도읍지에 대한 면적이며 이러한 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 도읍지의 면적도 수백 만평에서 1천 만평 이내로 나타나며, 중국에서 큰 면적의 도읍지는 수당시대의 낙양성으로서 1,500만~1,700만평 당의 장안성 도성 면적도 2,540만평으로서 방대한 면적이었다.


 상기 이외 중국 고대국가의 도읍지 면적과 비슷한 것으로 수백 만평에서 1천 만평 정도의 규모로 추정되고 있으며 또한 뒤늦게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운 고대국가의 면적까지도 수백만평에 해당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한성백제시대의 왕성에 대한 규모를 예측하는데 비교해 볼 수 있는 왕성으로는 보다 가까운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서 분리되고 오랫동안 각축전을 전개 하면서 힘겨루기를 하였던 왕도로서는 고구려의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한 안학궁과 대성산성이다.


 안학궁의 궁성의 면적이 11만 4950평이며 배후 산성인 대성산성은 동서가 2.3km 남북이 1.7km 이며 안학궁은 왕이 평상시 거주하는 도성이며 대성산성은 항전에 유리한 배후산성이다.


 또한 앞선 시기의 압록강변의 국내성과 한도산성도 같은 도시 구조로서 주변에 백성들이 살고 있는 평지 도성 전체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백제가 한강권을 빼앗기고 축소되어 갑자기 천도한 공주는 왕과 백성이 사는 도성 전체의 면적이 약300만평 정도이며 부여는 약500만평에 달하는 규모이다.


 지금까지 공주나 부여에서는 왕궁에 대한 유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도성 전체의 대략적인 것을 산출한 규모이다.


 위의 자료에서 삼국시대 궁성의 규모는 10여 만평 내외에 속하며 배후산성의 둘레는 7~8km이며 백성들이 거주하는 도성의 규모는 300만평에서 최소한 500만평 내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천년 도읍지는 삼국을 통일했을 때의 팽창된 것으로 삼국시대의 규모는 적었을 것으로 예상 할 수 있다.


 고려의 궁성은 약 7만5600평이며 조선시대의 경복궁도 약11만평이다. 대부분 왕궁지의 면적만 해도 십 만평 내외에 해당하는 규모로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임을 알 수 있고 고대국가의 발전 속도는 몇 백 년 사이에 갑자기 팽창하거나 축소되는 규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규모와 지금까지 백제 한성시대의 도읍지로 거론되어온 위치와 비교해 보면 예측이 가능한 유적인 가를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온 몽촌토성은 6만64평이며 풍납토성은 22만 6천평으로 수백 만평에 달하는 삼국시대의 도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이다.


 또한 왕성이라면 구조가 단순하지 않으며 제정일치 사회는 종교시설과 보다 완벽한 보호 방어시설로 겹겹이 둘러쌓여 있어야 하며 배후산성도 있어야 만이 그 당시의 도읍지로 볼 수 있다.


 현재 하남시에서 나타나는 백제 초 ? 중기의 도읍지 규모는 대략 하남위례성으로 입증되고 있는 교산동 일대의 성은 약40만평 내외로 추정되며 내부에 있는 궁성은 약 10만평 내외로 보고 있다.


 한성 전체의 도성 규모는 약1천 만평 이상이며 유사시의 배후성인 남한산성은 원성의 둘레가 7,545m로서 그 시기 고구려 왕도의 배후성인 환도산성이나 평양 시기의 대성산성과 규모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서도 사용 하였던 만큼 백제시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성내부를 적들이 굽어 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축성의 기본이기에 지형상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한성지역에 있을 때 중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하였던 거대한 힘을 가졌던 국가임을 알 수 있고 현재 나타나는 규모 역시 삼국 중에 제일 큰 규모의 도읍지가 발견됨에 따라 이러한 것들이 입증되고 있다.

백제가 삼국 중에 제일 강성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쪽에는 신라, 북쪽에는 고구려 그사이에서 협공을 받아가면서 수 백 년 동안 지탱하였다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삼국시대의 도읍지 규모에 대하여 알아본 결과 도성 전체의 규모는 대부분300만~1000만평이며 궁성의 면적은  약 10만평 내외로서 대략적인 규모를 알 수 있고 유사시에 항전할 수 있는 배후성은 둘레가 약7~8km로서 그 당시 공통성을 나타내고 있다.


 위와 같이 삼국의 도성 면적 등을 유적이나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비교해본 결과 삼국의 힘은 강대한 것으로 중국의 거대한 국가와 싸워서 영토 확장과 견제를 해온 고구려이며 이러한 고구려를 백제는 여러 번 침공하여 왕을 죽였으나 한동안 크게 보복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백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고대 국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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