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로 발표

    기와 크기, 당시 신라변방 군사지역 등 역사적 사실 미약

 남한산성행궁지 8차 발굴조사결과 발굴단은 지난 20일 행궁지 아래에서 발굴한 대형 건물지가 통일신라 시대의 건물지라고 발표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오판임이 드러나고 있다.


 신라시대 주장성을 쌓았다는 시기는 문무왕 12년(서기672년)이며 백제의 근초고왕이 한산에 도읍을 정한 시기는 근초고왕 26년(서기 371년)이다.


 위의 내용에서 발굴단은 672년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 할 때의 건물지라고 하고 있으나 무려 300년 차이라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다.


 첫째 이곳에서 발견된 건물지는,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발견 할 수 없는 기와의 크기로서, 일반기와의 무게는 약 4Kg 인 반면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는 약 19Kg이다.


 크기나 무게 면에서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 신라지역이나 그 어느  나라에서 발견된 예가 없음에도 달리보지 않고 통일신라시대라고 단정하고 있다.


 둘째 통일신라시대(7세기말)는 이미 기와의 크기가 정형화 되어 지금의 기와  크기와 유사하며 이러한 기와는 일반적인 기와가 아니라 특수한 건물로서 신라 변방의 군사 지역에서 이러한 거대한 건물을 축조하였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건물과 기와가 발견 되어야 한다.


 신라왕도에도 발견된 예가 없으나 하남시 백제왕도에서는 완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정도 두꺼운 와편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세째 기와를 소성한 재질에서 5세기가 되면 지금의 기와처럼 단단한 검은색의 기와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는데 발굴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물을 흡수하는 소성도가 낮은 연질 기와가 출토 되었다.


 이는 백제 근초고왕때 한산으로 도읍을 정한 시대와 동일한 기와 유물이 많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거대한 건물지를 축조하면서 물을 흡수하는 기술과 소성도가 낮은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 만큼 시대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발굴단이 말하는 7세기 말의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조선시대에 버금가는 단단한 경질(硬質)의 기와이다.


 그러므로 본 건물지 발굴은 백제시대 이전의 기와 유물이 대부분이며 백제시대 토기편도 함께 발견되고 있다.


 네째 하남시에서 백제 왕도가 발견되므로서 그 당시 산성인 남한산성에도 백제와 관련된 건물지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나라 15곳의 고대 왕도를 찾아낸 결과 왕도는 산성과 도성이 하나의 셑트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철칙으로 남한산성을 백제와 관련하여 생각은 물론 보고서에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많은 발굴이다.


 다섯째 남한산성의 성벽중에 남한산 일대에서 나지 않는 화강암으로 쌓은 성벽은 이성산성과 함께 한강건너에서 운반하여 쌓은 성으로 백제 왕도이외는 변방세력이 장구한 세월 동안 쌓을 수 없고 신라왕도에도 이렇게 정성들인 고급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시대 남한산성 성돌을 운반한 운하(運河) 유적이 하남 덕풍천에서 발견되어 남한산성을 성돌 운반 경로를 알 수 있었다. 발굴단의 주장이라면 63빌딩을 시골에 건립하였다는 논리와 같다.


여섯째 발굴 보고서에서 천주(天主)라는 명문이 기와에서 발견되었고, 천주는 곧 천왕(天王)의 대명사를 의미하므로 왕궁지 임을 입증하는 명문이다.

이러한 명문은 아무 곳에서나 사용 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일곱째 조선시대 남한산성에 백제시조를 모시는 숭렬전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그 때 까지만 하여도 백제왕궁지 유적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남한산성에 백제와 관련된 사당을 건립하였다.


 여덟째 목탑(木塔)은 삼국초기의 탑이며 그 다음은 전탑(塼塔)과 석탑(石塔)이다.


 하남시에서 황룡사 목탑보다 더 큰 규모의 목탑(木塔)이 2기나 발굴되어도 국민으로 하여금 알 수 없도록 은폐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목탑도 신라에서 건립할 수 없어 백제의 아비지가 건립을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무시하였다.


 하남시에서 거대한 고대도시 유적이 발견되어도, 이성산성을 신라의 성이나 고구려라고 하면서 백제 왕도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하남시에서 백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남한산성 발굴에 관여한 만큼 결과는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아홉째 지난번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에서 백제 유물이 많이 출토 되었다면 보고서에 이를 거론해야 함에도 의도적으로 거론을 하지 않았다.


 풍납토성에서는 제대로 된 초석하나 발견되지 않았기에 왕도 아님이 밝혀졌다.

결론은 20년간 한강권을 발굴하여도 백제 왕도는 없다는 모르쇠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된 학문도 용기 있는 자만이 고백을 할 수 있으며, 백제 왕도는 한강에서 바늘 찾기가 아니며 식민사학의 병폐는 종식 되어야 한다.


 일정시대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나이가 많으면 교체가 되지만 논문으로 전해지는 식민사학은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슬픈 역사 이며 특히 백제사 는 일본과 연관이 많기에 왜곡이 제일 많이 되었다 .

 따라서 앞으로 남한산성 발굴에 있어서는 심층적으로 연구 되어야 하며, 이제는 문화 전쟁 시대로서 문화 자원이 얼마나 지역 경제에 영향을 주는지, 광주 하남 시민들은 동양을 제패 하였던 백제 왕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때 라고 생각한다.

         글:한종섭 <본지 논설위원, (사)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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